타종교는 꿈도 꾸지 못하는 고난에 담긴 하나님의 뜻
요셉의 경우도 바울과 세부적으로는 조금 달라도 근본 흐름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소명을 받고서 그에 충성하려 모든 고난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반면에 요셉은 아직 청년일 때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갔고 억울하게 옥에 갇혔습니다. 그 때까진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로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고 자기 동족을 기근에서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드라마 같은 모든 사건을 다 겪은 후에 형들과 아버지 야곱을 만나서 고백하는 내용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45:7,8)
하나님은 요셉의 개인적 고난을 통해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생명을 보존할 계획을 세웠고 또 그런 장래 계획을 어린 야곱에게 꿈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꿈을 꾸었을 때와 애굽에 팔려가 총리가 된 한참 후에도 그 꿈의 구체적 의미는 몰랐고 언제 실현될지 감감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가문 모두가 애굽에서 안전하게 자리 잡은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놀랍고도 신비한 계획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또 그 후손들이 비록 노예생활을 했지만 당시 세계 최강 애굽의 보호 아래 하늘의 뭇 별처럼 창성해져서 하나님이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입성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겪는 고난에서 가장 특유한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처럼 미리 알았던, 요셉처럼 결말이 난 후에야 알았던,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신자에게 그런 고난의 모습을 통해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런 계획입니다. 성경의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스데반 등등 믿음의 선진들이 다 그런 고난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이는 타종교는 가르치기는커녕 상상도 못하는 하나님만의 뜻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참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기에 고난의 그런 의미는 아예 알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 같은 범인입니다. 해외 선교사나 전문 목회자로 헌신하지 않은 일반 신자가 바울이나 요셉 같은 하나님의 큰 소명을 받지도 못하고 또 그런 일을 하려는 헌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은 같습니다. 요셉이 자기 일생에 대한 계획과 소명을 몰랐을 때도 순전한 믿음으로 성실과 정직으로 일하니까 보디발과 전옥이 그를 하나님의 사람인 줄 알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어 모든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반 신자도 총리가 되기 전의 요셉처럼 살아야만 합니다. 고난이 닥치면 뜨겁게 끈질기게 기도해서 이겨내는 모습만 보여선 안 됩니다. 기도에 응답받아 하나님이 실재하고 신자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은 당연히 증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고난이 그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신자는 그런 고난에도 하나님만의 분명하고 의로운 계획이 따로 있고 지금 그 일에 쓰임 받고 있기에 단순히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고난 중에도 기뻐하다니 불신자로선 언뜻 아니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요셉과 바울의 경우에서 살펴봤듯이 고난 중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숨겨져 있고 그런 계획에 지금 신자가 고난을 통해서 쓰임 받고 있는 것이 기독교인만이 알고 누릴 수 있는 고유의 특권이자 은혜입니다.
고난에 담긴 하나님의 또 다른 두 가지 뜻
어지간한 믿음을 가지지 않으면 고난 중에 감사하고 기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구체적 계획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는 크고도 중요한 이유 둘이 더 있습니다. 우선 신자의 성장입니다. 성품이 바뀌고 믿음이 자라며 주위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게 하는 것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원인 모를 극심한 고난에 시달렸던 욥이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있고 자기를 더 깎고 다듬어 정금처럼 만들 것이라는 사실만은 의심치 않았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시편 기자도 고난으로 인해 오히려 성경에 계시된 주님의 뜻을 더 깊이 깨달아 자신에게 유익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고난으로 성품이 변하고 주위에 덕을 끼치는 대표적 예가 야곱입니다. 형 에서에게서 도망쳐 타향에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여년 고생을 겪은 후의 그는 이전과 전혀 달라졌습니다. 형을 배려하고 열두 아들을 믿음으로 양육합니다. 단순히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년에는 세계 최강국 애굽의 바로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하나님의 권능을 소유하고 실현하는 그분의 종이 되었습니다.
불신세상에서도 실패는 젊어서 돈으로 사서라도 해보라고 합니다. 고난을 통해 인간은 한층 더 비약 성숙합니다. 신자는 고난을 통해 성품도, 인생을 사는 지혜도, 인간을 대하는 태도도 다 자라지만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친밀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쓰임 받으려는 겸손하고 헌신된 자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많은 고난을 겪은 후에 외아들 이삭을 바치는 자리에까지, 바울도 처음에는 사도됨을 증거하다가 나이 들수록 하나님 앞에 무익한 종이요 천하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신자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둘째로 중요한 뜻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는 고난을 통해 너무나 많은 영적 진리를 배울 수 있고 각 개인마다 그 종류와 깊이가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 제일 중요한 원리 셋만 들고 있습니다. 마지막 셋째는 고난에서 얻고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를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1:3-6)
신자의 고난은 하나님이 결국은 합력해서 선으로 이끄시고 신자에게 유익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다른 고난 가운데 있는 이들을 위로케 하라는 것입니다. 불신자처럼 단순히 고난을 이겨내는 노하우를 전수하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일단 서로 위로하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시키라고 합니다. 모든 위로와 권면을 십자가 구원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목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웃을 섬기는 것이 단순히 현실적 어려움을 돕는 구제 차원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고난 겪는 자들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진짜 살고 죽음, 기쁨과 괴로움은 십자가 예수 안에 들어와 있느냐 아니냐로만 나뉩니다. 현실적으로는 당연히 도와주어야 하지만 결국은 십자가 은혜로 이끄는 목적에 도움이 되어야만 합니다. 신자는 고난 중에 그리스도로부터 위로를 받았기에 다른 고난 중에 있는 자에게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위로를 알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고난이 끝나지 않고 순교로 이어질지라도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고 죽을 수 있는 자가 되어서 서로 위로 권면하며 십자가 안에서 함께 믿음의 승리를 하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고난 중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하신다는 가장 큰 세 가지 목적을 다시 간단히 정리해봅시다. 첫째, 신자가 알든 모르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일에 쓰임 받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 신자의 성품이 변하고 주님과 관계가 더욱 친밀해져 주위에 그분의 빛을 비추어 다른 이로 예수의 주님 되심을 알게 할 뿐 아니라 그분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동일한 환난 중에 있는 성도와 이웃을 위로하고 함께 십자가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승리를 맛보라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 철학 도덕이나, 다른 종교에선 가르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예수 믿는 신자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정말로 고귀하고도 소중한 은혜이자 특권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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