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문화를 기능적·기술적으로 비판적 수용하는 것 필요
현재 문화사역, 교회 안에서 머물러 있을 뿐… 피상적
영적 공동체는 수용한 세상 문화를 재해석 할 수 있어야
코로나는 ‘역사적 전환점’, 교회는 이것 인식하고 ‘재정비’할 때
한국교회에서 큐티사역과 청소년 사역으로 25년 동안을 섬겨온 문서선교단체 ‘성서유니온’ 출신의 탁주호 목사는 한국교회에 많은 열정을 가지고 있는 목회자이다. 그 열정만큼이나 한국교회에 안타까움과 회복에 대한 강력한 갈망이 그와의 대화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되었다.
부지런히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탁 목사는 탁월한 ‘성경 교사’이며 현재는 ‘성서인문학서원’이라는 사역을 섬기고 있으며, 풍부한 청소년 사역과 큐티, 말씀 사역의 깊은 경험을 날카로운 지성으로 통찰한다.
그는 “코로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재정비하시길 원하신다’라고 생각한다”라며, 그 문제와 원인과 분석, 그리고 해결의 토대가 무엇인가를 하나씩 짚어갔다.
아래는 그와의 일문일답.
Q. 간단한 자기 소개 부탁드린다.
A. 청소년 시기에 친구의 소개로 교회를 나갔다가 청년 시기에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청소년들에 대한 꿈을 안고 신학을 공부했고, 목사가 됐다. 목사로서 ‘말씀’과 ‘제자훈련’을 통해서 청소년들을 지도하고 싶었다. 그 이유 중 한 가지는 청소년 시기에 굉장히 말씀에 대한 갈급함은 있었는데, 청소년부에서는 교회 행사와 찬양, 프로그램 위주로 돌아가서 내 갈증을 해소할 수 없었다. 물론 그 당시 우리 교회는 시골교회였다. 교사와 사역자도 별로 없었고, 동네 형들 그리고 권사님이나 교회를 조금 오래 다녔던 분들이 교사 역할을 하셨었다. 그래서 한계가 참 많았다. 생각해 보면 그분들이 그냥 교회 행사를 하는 재미로 다녔던 것 아닌가 싶다. 나중에 보니 그것이 내 신앙에 도움이 많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정말 말씀으로 가르치는 사역자가 좀 필요하구나’라고 생각했었고, 후에 ‘갈등이 많은 청소년들에게 말씀으로 사역해야겠구나’라는 생각으로 신학을 공부하게 됐다.
그 당시에는 교육 방법이 별로 없었다. 티칭 방법으로는 ‘제자훈련’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서 나는 제자훈련을 받았고, 사역자가 돼서도 아주 일률적으로 중·고등부만 사역했다. 감사하게도 성경말씀을 가르치는 것만으로 중·고등부를 부흥시키는 경험도 할 수 있었다. 또 그런 경험을 통해 ‘성서유니온’이라는 단체에 들어가게 됐다. 그곳에 들어가기 전에는 청소년들을 위한 교회를 개척했었다. ‘1318 제자들교회’라는 교회였었는데, 한 청소년 아이들 20명 정도가 예배를 드렸다. 오직 성경만을 가지고 사역했었는데, 그때 ‘성서유니온’에서 “여기 와서 청소년들을 위한 큐티책을 좀 만들면 어떻겠나”라고 사역제의가 들어왔다. 사실 나는 그 당시에 성도가 300명 정도가 출석하는 교회에 후임 사역자로 내정이 돼 있었다. 안수만 받으면 들어가는 상황이었기에 성서유니온의 제의를 거절했었다. 그러나 성서유니온의 강한 요청이 있어서 성서유니온에 들어가게 됐다.
그래서 성서유니온에서 ‘청소년 매일성경’ 창간을 기획했으며, 성경을 기반한 청소년 사역에 집중했었다. 학교 사역도 했고, ‘큐티캠프’라는 캠프를 만들어서 큐티로 양육하는 과정들로 아주 오랫동안 사역했다. 그 사역이 연장되어 어른들도 사역했지만, 내 마음과 사역의 중심에는 25년 동안 청소년 사역을 하게 됐다. 그렇게 사역하다 보니 ‘어린이 사역’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왜냐면 주일학교에서 신앙을 잘 훈련받고 초등학생들이 청소년부로 올라오면 좋겠는데, 어떤 친구들은 신앙적으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올라오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이것이 나에게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청소년 사역의 마지막 한 5년 정도를 어린이 캠프를 통해서 어린이 사역을 했다.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말씀을 잘 가르칠 수 있는가’를 고민하면서 공동으로 책도 집필했다. 그 다음에는 청소년 다음으로 청년·대학사역을 하면서 ‘인문학적 사고’를 가지고 성경을 볼 수 있도록 ‘청소년과 청년사역을 연결하는 역할’을 좀 했다.
처음에는 청소년 사역자가 됐지만, ‘단계적으로 밑에서부터 다루어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라고 생각하면서 어린이들부터 시작해서 청년, 장년까지 연계해서 사역하는 것을 목표로 두었다. 어릴 때부터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을 읽는 좋은 습관을 기르는 일들로 시작해서, 중·고등부 학생들에게는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를 하면서 적어도 실천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청년에 와서는 인문학적 사고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풍성한 삶을 가지게 했다. 어른들이 돼서는 성경에 집중하면서 다음 세대, 자녀들과 손자·손녀들을 양육하는, 가정에서의 영적인 위계가 세워지는 사역자들을 양육하고 세워가는,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 성경을 가르치는 작업에 25년 동안 집중했다. 때마다 필요에 따라 책을 집필하고, 또 다른 방법들로 섬기는 것이 나의 사역의 전체적인 그림이다. 25년 동안 사역하고 은퇴해서 지금은 ‘인문학적 책 읽기’ 사역과 이것을 교회에 정착시키기 위해서 ‘묵상 목회’, 그리고 교사나 소그룹 리더를 양육을 위한 ‘묵상연구소’라는 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다.
Q. 25년 동안 큐티사역을 해 오셨다. 큐티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A. ‘큐티’라는 개념은 좀 제한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방법론적인 큐티’라기 보다는 ‘성경’에 뿌리내리는 묵상과 ‘말씀’에 기반한 사역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청소년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의 토대 위에 다른 사역을 하는 것’이다. 찬양부터 해서 교회 프로그램, 수련회 등 모든 일정들이 말씀의 토대 위에서 교회 안에서 진행돼야 한다. 그런 면에서 성경은 굉장히 중요하다. 한국교회는 큐티에 대해 ‘방법적’, ‘기술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무슨 ‘학습지’처럼 아이들에게 던져주고 끝낸다. 그런데 기술적으로 큐티를 한 후에 공동체가 함께 해석해 나가고, 공동체가 함께 적용해 나가는 측면으로서의 교회, 개인 큐티라면 개인이 묵상하고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교회가 단체로 할 때는 ‘공동체의 큐티’에 집중해야 한다.
공동체가 같은 본문을 가지고 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한데, 큐티 책들을 참조할 수 있고, 설교를 가지고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떤 본문을 지정해서 할 수도 있다. 나는 책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같은 본문을 ‘공동체가 함께’ 읽고, 각자 의견들을 발표를 하는데, 그것을 ‘나눔’이라고 한다. 그래서 각자 소그룹에서 나눔을 할 때 내가 발견한 것을 독특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가 그 나눔을 통해서 내가 이해한 것을 ‘조율’해 나가는 것이다. 또한 성경 교사인 선생님의 지도하에 공동체가 어떤 본문의 문제를 함께 해석해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가끔은 목사님들이 ‘아이들이 잘못 해석하면 어떻게 하는가’라고 염려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공동체가 그 정도 수준이라면 이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리고 ‘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중에 각자가 삶의 자리로 나가서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예배’이다.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해서 전리품을 가지고 와서 다 함께 나눈 것처럼, 모두가 삶에서 말씀을 실천하고 거기서 얻은 전리품을 가지고 와서, 공동체와 함께 전리품을 ‘평균화’해 가는 것이다. 이것이 반복되고 1주, 2주가 그렇게 점점 지나서 1년이 지나면 눈덩이처럼 우리 공동체가 성숙해가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것이 큐티이다. 이런 측면에서 큐티를 정의 내린다면, 이를 기반으로 찬양팀이 큐티를 시작하고 1년이 지나서, 음악적인 기술로만 찬양하던 연주자와 인도자들이 아주 말씀이 삶에 적용된 찬양을 하게 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듣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주는 찬양을 하게 된다. 이렇게 각 사역에 묵상 사역이 ‘융합’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까지 교회들을 지켜보면,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방법에만 머물러 있거나, 나누기만 하고 끝낸 다거나, 느낌만 이야기를 한다. 이런 것이 조금 안타깝다.
그러나 교회는 좋은 설교자, 선생님, 연대할 수 있는 공간 등 참 다양하고 좋은 기능들이 있는데 이런 것을 활용하지 못해서 아쉽다. 설교는 설교대로, 공과는 공과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삶은 성경하고 상관없이 그냥 일주일 동안 자기 옳은 대로 ‘세상의 가치관’대로 이것이 전부다 따로따로 논다. 그런데 이런 것을 하나로 연합되게 하는 것이 교회이다. 그래서 못 따라오는 친구들에게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격려만 해주는 것도 좋지만, 오늘의 말씀을 주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는데, 나와 함께 해보지 않을래?’라고 하는 말씀을 기반으로 하는 격려, 상담, 코칭들이 한 곳으로 연합된다면, 그것이 교회에서 짧은 시간에 힘 있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가 힘있게 나가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따로따로 놀기 때문이다. 어쩌면 각자 요소와 기능을 따로 탁월하게 하는 교회들은 있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이것이 잘 연합되고 융합되지 않아서 좋은 것들의 ‘총체’가 안된다. 이런 과정들을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고, 토대를 차근차근 잘 놓으면서 같이 가는 것이 교회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모이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에서 잘 못 따라가는 사람들은 더 많은 영적인 전리품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것을 나누면서 믿음의 평균화를 이루는 것이 큐티이다. 큐티책 한 번 읽었다고 끝내는 것은 큐티가 아니다.
Q. 한국교회 청년, 청소년들의 문화사역을 어떻게 경험하셨고, 진단하시는가?
A. 문화라고 얘기할 때, 교회 문화를 만드는 것에 있어서 우리나라가 기독교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 밖의 문화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경향이 많다. 나는 이런 것을 찬성한다. 나는 들어오는 것까지는 반대하지 않는다. 찬양을 하더라도 놀이나 게임을 하더라도 교회 밖의 것을 가져온다. ‘기술적’이나 ‘기능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청소년들에게 오는 문화라는 것은 문화의 기술적 전달에서 끝난다. 중요한 것은 교회라는 영적 공동체는 이것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기독교 문화를 지켜서 그 기술을 전수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세상의 문화를 가지고 올 때, 이것을 해석해 내서 교회의 문화 속에서 우리의 몸에 체득되게 하는 것이라면 너무 좋은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하는 독서 모임도 마찬가지이다. 글을 읽을 때, 주어도 찾고 동사도 찾고 결론구 찾고, 문맥과 행간을 읽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 기술적인 문장 이해도가 있어야 글을 읽을 때 도움이 된다. 성경을 읽을 때 그 방식을 가져오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을 읽을 때, 주어, 동사를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한 절에 주어, 동사만 찾으면 끝난다. 성경도 글이기 때문에 결론구 찾는 것이 엄청 중요하다. 왜냐면 이것을 찾으면 그 글의 핵심 내용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상의 글 읽기 방식을 가지고 성경에 와서 성경 읽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측면에서 너무 좋다.
문학의 한 예를 들면, 좋은 소설을 읽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잠재적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 믿지 않는 사람이 유명한 소설 ‘죄와 벌’을 읽었다고 치자. 이 책에서 많은 감동을 받은 독자가 ‘나도 나중에 종교를 가진다면, 이 책의 저자가 기독교인인 것처럼, 기독교인이 돼야지’라는 잠재의식을 가질 수 있다. 추후에 어떤 기독교인이 이 사람에게 전도를 한다면, 그 사람은 굉장히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이 문화사역이 ‘잠재적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이다.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음악을 하면서 세상에서 좋은 음악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보이지 않지만 내면에 그런 가치를 가지고 문화사역을 하면, 대중이 이것을 들었을 때에 작가의 가치를 이해하게 된다면, 대중 중에는 그 가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가 누군가는 나중에 종교를 갖게 되면 기독교를 가질 것이다.
내가 청소년기에는 교회 안에 ‘문학의 밤’이 최고 절정이였다. 그 당시 연예인 중에는 ‘교회 문학의 밤’ 출신들이 엄청 많았다. 나는 그런 간증은 수도 없이 들었다. 교회의 ‘문학의 밤’이 세상의 문화를 만들어 갔다. 나는 그런 문화사역을 추구한다. 지금은 찬양 같은 것이 찬양의 콘서트 같은 것들이 교회 안에 머물러 있다. 나는 이것이 교회 안에서 이것이 재해석 돼서 세상에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직까지 재해석도 잘 안 돼 있다.
Q. 코로나 3년 어떻게 보시는가?
A.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와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라는 책을 추천한다. 역사 속에서 전쟁이나 전염병이 있을 때, 인류사적으로 어떤 ‘전환점’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시대에 코로나의 의미는 세상이 바뀌었다는 의미이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역사적인 현상’에 대해 우리는 ‘역사적 해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죄 때문에 그렇다’라고 하기도 하는데 나는 이것이 조금 극단적인 해석이라고 본다. 코로나는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의 ‘한계 설정’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교회)가 해 왔던 방식이 틀린 것이다. 그래서 한계가 왔다. 이것을 모두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 ‘재정비’를 하자는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점검하고 정리하라는 (영적인)‘사인’이다. 그러면 한국교회는 코로나 정국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이때까지 하고 있었던 것들을 한번 돌아봐야 한다. 성경을 보는 방법, 성경을 대하는 방식, 혹은 우리가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많은 종교적은 행사들이 과연 성경적으로 하고 있는지 재정비해야 한다.
그리고 목회방침, 한국 1세대 목사님들에 대해 여러 가지 얘기를 할 수 있지만, 배움의 척도로만 얘기를 해 본다면, 1세대 목사님들은 학교 공부를 제대로 못 했던 시대이다. 지금 시대는 완전히 다른 시대인데, 아직도 1세대 방식에 머물러 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이 있다. 탁석산이라는 철학자인데 그분의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이 있다. 그 책에 보면 시대구분을 이렇게 했다. 조선 말기부터 박정희 정권 시대까지는 ‘생존의 시대’라고 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먹고사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먹고 사는 것이 복음’이다. 먹는 것이 최고였다. 지금도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박정희를 아직도 연모하고 있다. 그다음 시대 전두환·노태우 ‘군사 정권 시대’에는 ‘생활의 시대’ 즉, 집사고 자동차 사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그다음 김영삼·김대중 ‘문민 정부 시대’에는 ‘행복의 시대’라고 한다. 이제 먹고 사는 것과 집도 차도 해결 됐다. 이제는 ‘나의 삶은 정말 행복한가’라고, 그 당시에 ‘정덕희’라는 분이 이와 관련된 책을 쓰셨다. ‘행복’이 화두였다. 그다음 ‘노무현 대통령 이후의 시대’에는 ‘의미의 시대’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탁석산’ 씨의 4구분 이후의 세대를, 독일에 있는 ‘한병철’이란는 철학자가 ‘이병박 시대’ 이후에 대해 ‘피로 사회’라고 한다. 이명박은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간다’, ‘하면 된다’ 이렇게 주입을 시켰다. 사실은 성공하는 사람들은 1~2% 내외이고 나머지 95%는 다 성공하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 이후로는 ‘투명사회’라고 한다. 지금 우리 시대는 ‘생존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과 ‘투명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다 공존해 있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먹을 것 주는 것이 복음인 사람이 있다. 투명하지 않더라도 ‘나는 먹는 것만 주면 최고야’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투명하지 않으면 촛불을 들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 엄청난 공존의 시대 안에 코로나가 이 복잡계를,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코로나가 정리했다.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이라는 사람이 2021년도에 ‘세계 경제 포럼’에서 필독서가 하나 있었다. 그 책 제목이 ‘위대한 리셋’이다. 코로나 정국에 수많은 책들이 대안을 내놨지만, 최고의 대안은 슈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리셋’(Reset, 재설정, 재시도)이다. 한국교회가 그 복잡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을 때, 코로나 시대에 대안이 없이 주저 앉았다. 그렇다면 답은 무엇인가? ‘리셋’, 즉 다시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내 이야기가 아니고 ‘클라우드 슈밥’이 썼고, 작년 윤석렬 정부의 키워드가 ‘다시, 대한민국’ 즉, 리셋이었다. 대부분 앞서가는 사람들의 모토는 ‘리셋’이다. 코로나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다시’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과거로부터 해 왔던 것들을 점검을 해봐야 한다. 잘한 것들은 더욱 잘 조정하고 잘못된 것들은 과감하게 포기해야 한다. ‘개독교’라고 욕 먹었던 우리의 문제점들은 과감히 내려놔야 한다.
다시, ‘리셋’을 하지 않는 이상은 안 된다. 나도 핸드폰을 만지다 보면 버벅거릴 때가 있다. 제일 좋은 방법은 ‘껐다, 켜는 것’이다. 그리고 안 되면, 수리를 받으러 가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껐다 켜 보면, 70~80%는 다시 된다. 아까 한국교회에 6세대가 공존한다는 것을 언급했는데, 지금 한국교회가 아무리 잘해도, 그중 아무 세대에도 안 맞을 수 있다. 설교도, 프로그램도, 공과 공부도 다시 해봐야 한다. 이것을 재정비하지 않고, 무조건 답습하는 것은 안 된다.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미래학자 최윤식 박사가 저술한 책을 보면, 다시 하는 것이 ‘핵심’인데, 무엇을 하는 것이냐면 ‘도전’하는 것이다. 내가 최 박사의 책 중에 감명받은 것은 ‘코로나를 통해 한국교회에 이전에 답습해 오던 것을 다시 하라고 기회를 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는, ‘실패하는 사람’은 익숙함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한국교회 청소년 사역도 동일하다. 지금까지 코로나 이전까지 해 오던 익숙하던 것을 답습한다면 똑같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위대한 도전을 해야 하는데 ‘낯설음’에 대해 도전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하던 것을 조정·정비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
미래학자 최윤식 박사는 거기에서 ‘일본경제’를 얘기한다. 일본경제가 ‘도제식’으로 익숙함으로 일대, 이대, 삼대 전수만 해오다가, 새롭게 창의적으로 하지 않고 암흑기 20년을 보냈다. 그러다 창조적인 한국 사람들에게 추월당했다. 그리고 이제 한국은 그 ‘낯섦의 위대한 도전’을 향해서 중국 경제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속 말씀을 주신다. 그런데 그의 백성이 못 알아 들으면 하나님께서 환경을 통해서 말하고, 정 안 되면 짐승을 통해서도 말한다. 오늘 오기 전에도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는데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한다. 안 되면 나팔이라도 불어서 소리도 내어 시청각으로 보게 하고 듣게 하기도 하신다. 그렇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싸인을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익숙한 자리를 떠나 ‘낯설음’에 도전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학자들이 얘기하는 ‘성공과 실패’라는 잣대를 교회에 들이대기는 어렵지만, 나는 ‘우리가 다시 일어 설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선수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성경을 읽어보는 것이다. 예전 방식대로 줄창 읽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다시 해석해 내는 것이다. 즉 ‘과거의 의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의미’를 해석해 새롭게 찾아내야 한다. 성경 읽기도 다시 해야 한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것이 토대가 되면, 세상의 앞서가는 다양한 기술적인 것 ‘메타버스’, ‘코딩’, ‘아이패드’ 등 다 이용할 수 있다. 이런 기술적인 것들을 교회에서 잘 재해석해서, 새로운 문화로 가는 것이다. 메시지도 율법적인 설교 벗어나서 성경으로 다시 가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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