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너(혹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세상이 정의한 ‘너 (혹은 너)’의 개념이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그에 대한 반응으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개념적으로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가에 대해 ‘요한복음 1장 1절’로부터 해답을 제시했다.
이정훈 교수는 근대부터 현대 사회까지 흘러온 유럽의 사회의 ‘합리적 인간과 주체적 사고’라는 통념을 비꼰 프랑스의 정신분석가이자 철학자인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이론을 소개하며, 유럽에서부터 시작한 현대 사상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한편 크리스천으로서 현대 사회의 현상과 사상의 흐름에 대해 무비판적인 반 지성적 행태가 아니라, 정확하게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개념적 이해를 갖는 지성적 접근의 필요를 강조했다.
또한 현대 사상의 건강하지 못한 부분으로 인해 병들어간 사회와 문화를 ‘창세기의 지상명령처럼 세상을 정복하되, 세상적인 방식이 아닌 로마서 8장의 말씀처럼 신음하는 피조 세계를 사랑으로 회복시키는 방식으로 해야한다’고 주장하며, “말씀대로 세상을 정복하자”고 했다.
# 라캉의 코키토(Cogito) 해체
‘코기토(Cogito)’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go sum)’라는 라틴어 문장 또는 명제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 교수는 “이 코기토는 ‘인간은 합리적으로 사고한다’라는 의미이며, 이 명제가 근대 세계를 등장시켰다”며 “그런데 라캉이 이 명제를 해체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열광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예를 들어 “교회 모임을 갔는데, 김 집사만 발언하면 나는 꼭 반대하고 싶다. 왜냐고 물어보면 대다수의 사람은 유창하게 본인이 생각할 때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한다”라며 “그러나 사실 깊이 들어가 보면 무의식 속에 상처 같은 것, 억압된 것이 있다. 김 집사는 아무 의도가 없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 나의 무의식을 건드린다. 나는 그저 반사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고 했다.
또 지인인 기업가와의 대화를 소개하며 이 교수는 “알고 지내던 회장님이 ‘사람들이 좋은 차를 원하는 것은 승차감 때문이 아니다’라고 해서 내가 물었다. 그러자 ‘하차감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하차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차에서 내릴 때, 주변 사람들이 우와! 하는 것’이라고 했다”라며 “이것이 바로 라캉이 비꼬는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현대인들은 자신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이 나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라며 “라캉은 '현대인이 다른 사람의 욕망으로 스스로를 채워버리고, 우리는 그냥 무의식 속에 억압된 것으로 장난치고 있을뿐이라는 현대인의 비참함'을 폭로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라캉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언어가 나를 규정한다’ -의식적인 주체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쓰여지는 언어가 그 주체를 규정한다- 라고 주장한다”라며
“이 시대의 청년들이 싸구려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그것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데, 자신들은 그것을 진리로 믿고 있다. 내가 한국 교회에서 본 이상한 현상 중에 한 가지는 청년들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혹은 교회)를 조롱할 때는 그들과 동조하다가 특정 정치인을 비판하면 상을 엎으려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 청년을 지배하는 것은 요한복음 1장 1절의 그의 로고스가 아니고 얄팍하고 값싼 이데올로기이다”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믿지 않는 철학자가 보기에도 정신분석을 해 보았더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굉장히 허망한 존재이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이데올로기 서푼에 휘둘리고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너를 지배하는 언어가 바로 ‘너’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움직이는 것이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냥 마르크스의 언어를 떠벌리며 잘란 척 하는 것이고, 니체가 한 말로 폼을 잡고 ‘나는 이 시대의 똑똑한 사람이야, 나는 지성인이야’라고 떠벌리는 수준에 불과하다”라며 “즉 니체의 꼭두각시요, 마르크스의 꼭두각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우리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신 ‘그의 사랑받는 자녀’이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나를 다스리는 것이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나를 다스리는 것이다. 이렇기에 사도행전이 나타나는 것이다. 강력한 능력을 나타내고,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존재의 레벨이 달라진다”고 했다.
# 정복의 개념의 차이 - 그리스·로마 vs 기독교
이 교수는 “현대 사회를 있게한 유럽 문명의 2가지 축은 그리스· 로마 문명과 기독교 문명이다. 이 두 기둥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흘러왔다. 사도행전 17장을 깊이 묵상하면, 바울이 로마를 정복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로마는 어떻게 정복해 나가는가? 굴복시키는 것이다. 공포를 심어줘서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이다”라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만난 바울은 생명을 살려서 누구도 정죄받지 않고, 누구도 내가 갖은 아픔 때문에 상처받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영혼을 구속하는 방식이다”라고 말했다.
# 자유주의와 현대성은 정복의 대상
이 교수는 “현대성은 우리가 정복해야 하는 대상에 불과하다. 현대 교회에서는 자유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 자유주의에 대해 물어 보면, 그런 사람들은 그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다”며 “한국교회의 위기가 여기에 있다”고 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이란? ‘말씀과 신학을 현대성에 종속시키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어 “19세기부터 폭발적으로 과학이 발전했다. 말씀이 권위를 상실해야 하는가? 19세기의 얄팍하고 편협한 생각에 종속해야 하는가?”라며 “현대성 즉, 모더니티가 그들의 종교가 되었다. 그들의 편협한 과학주의적 방법론이 그들의 종교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크리스천)는 창조주이시고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신 요한복음 1장에 1절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움직이시기에 우리는 ‘현대성’이라는 현상조차도 정복해야 하는 것이다”고 했다.
# 기독교적 정복의 의미, 그리고 성경적 근거
이 교수는 “우리는 과학적으로 사고하지만 그것을 정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복의 의미가 다르다. 로마처럼 압제하고 모욕주고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복은 다 선교의 도구로 쓰며, 생명을 구하는 것에 쓰는 것이다. 생명을 구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지체는 선교사이다”고 했다.
이어 “우리는 현대성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지배하는 분은 누구인가? ‘말씀이신 그리스도’이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통해서 모든 영역을 지배하게 된다. 그것이 ‘영역주권’이다”라고 했다.
그는 “로마서 8장 18절~21 우리만 자유를 맛보는 것이 아니라. 제 3세계의 어린이들, 환경들, 사람뿐만이라 모든 학대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러 가는 것”이라고 말하며
“우리는 누구인가? 그 피조물들에게 그 자유를 전해주러 가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다. 우리는 현대철학에 흔들릴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면 말씀에 기반한 비전이 생긴다. 그리고 세상을 정복한다. 그러나 이 모든 출발은 사랑이다. 사랑받은 우리가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그 사랑과 자유의 선물, 우리가 예수의 손발이 되어 그것을 확장해 나가는 아름다운 역사이다. 우리를 통해서 사도행전이 계속 쓰여지는 것이다”고 했다.
# 결론적으로...
이 교수는 “기독교 세계관에는 기본적인 틀이 있다. 창조, 타락, 재창조(구속)이란 기본적 틀이 있다. 그런데 현대 신학계의 거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구조는 ‘현대 사회는 너무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그 단순한 구조로 다 담을 수 없다’이다. 그러나 나의 주장은 그 단순한 구조, 즉 성경의 본질에서 한 발짝도 타협하지 않고도, 우리가 현대 사회를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성경적 세계관’이다”라고 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