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웰본 선교사는 1900년 내한하여 황해도 배천, 강원 원주와 경북 안동, 영주, 문경, 상주, 봉화, 대구 등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누비며 오지에 복음을 전한 개척 선교사다. 순회 전도 시에는 평균 1천 리 길을 여행하며 ‘길 위의 전도자’로 불렸던 웰본 선교사는 일각에서 1903년 원산 부흥운동에 앞서 배천에서 부흥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아서 웰본의 한국 선교 기록을 통해 누구보다도 뜨거운 열정으로 양반과 평민 등 계층을 초월하여 복음을 전파했던 선교사의 발자취를 함께 따라가 보려 한다.

이 글은 아서 웰본 선교사의 손녀 프리실라 웰본 에비가 엮고, 미국 에스더재단이 『아서 한국에 가다』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것이다. 이 책 자료 중 아서 웰본 선교사의 일기에서 리진만 선교사는 독자들이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옛 지명, 인물, 상황 등에 설명을 덧붙이고, 에스더재단에서 제공하는 사진 자료 등을 첨부해 아서 선교사의 사역을 독자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편집자 주>

2013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내 선교기념관 2층에서 열린 양화진 선교사 추모예배에서 에비 여사(왼쪽)가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오른쪽은 통역을 맡은 에스더재단 김현수 박사
2013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내 선교기념관 2층에서 열린 양화진 선교사 추모예배에서 에비 여사(왼쪽)가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오른쪽은 통역을 맡은 에스더재단 김현수 박사 ©에스더재단

Ⅰ. 1900년 한국으로

아서 웰본(Arthur Garner Welbon)이 가려고 하는 한국은 화산이 터질 것 같은 변화의 상태에 있었다. 폐쇄된 왕국 한국은 고립되어 있었고, 그 문화는 수세기 동안 오륜(五倫), 오상(五常), 또는 오전(五典)1)이라는 고대의 법칙에 의존해 왔다. 개척 선교사이자 번역가 및 한국 작가인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법에 기초를 두고 세워진 사회는 그 법으로 둘러싸여 고정불변의 상태에 빠졌다. 준거법의 나침반은 너무 작았고 조건은 너무 다양해서 사회 구성원 중 어느 누구도 다른 모든 구성원을 방해하지 않고는 독자적인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어제처럼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는 문구가 한국의 모든 것에 커다랗게 쓰여져 있었고, 오전, 오륜, 오상이 움직이는 바퀴를 제외하고는 뇌의 모든 바퀴가 멈춰 있었다. 독자적인 생각은 꿈꾸지 않았다. 한국은 천 년 동안 아무런 발명도, 발견도, 진보도 없었다. 뒤로, 더 뒤로 나라는 후퇴했고 조금씩 조금씩 무의식적인 존재로 사라져갔다. 건축, 교육, 의상, 생활사가 관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2)

“오륜 오상 오전의 사회 구조 저변에는 다량으로 재어 있던 다이너마이트 화약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상업과 외교의] 개방, 외국 선교사들의 내한, 일본의 침입을 통해 이런 폭파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옛 한국의 이념과는 극명하게 반대되는 다른 새 이념을 맞이하게 되면서 모든 사회 제도가 크게 붕괴되고 있었다.”3)

아서 웰본의 한국 선교 기록 『아서 한국에 가다』 표지. 손녀 프리실라 웰본 에비가 엮고 미국 에스더재단이 출간했다. 1900년부터 1902년까지 아서 웰본의 초기 삶과 내한 초창기의 선교 사역이 정리돼 있다.
아서 웰본의 한국 선교 기록 『아서 한국에 가다』 표지. 손녀 프리실라 웰본 에비가 엮고 미국 에스더재단이 출간했다. 1900년부터 1902년까지 아서 웰본의 초기 삶과 내한 초창기의 선교 사역이 정리돼 있다.

당시 감리교 협성성경학원(Union Biblical Institute of Korea)의 원장이던 조지 히버 존스(George Heber Jones)는 이렇게 썼다:

“실정과 억압은 백성을 절망의 상태로 몰아갔고, 원주민 지도하에 이루어진 상업적, 정치적 개선을 위한 조치들은 실망스러운 실패로 끝났다. 사람들은 이교도 신앙과 종교의 척박함에 지치고, 피곤하고, 낙담했다. 도덕적으로 그들은 쇠약해졌고 빈사상태였다.”4)

이 격동의 시대에 위안을 받기 위해 마음을 돌릴 종교가 없었다. 한국의 종교는 조상 숭배와 불교, 도교, 정령 숭배, 점, 마술, 풍수지리, 점성술, 주물 숭배가 혼합되어 억압적이고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조지 히버 존스는 이를 잘 설명했다:

“이 혼들은 굴뚝과 헛간과 부엌에 가득하다. 그들은 주인이 집을 떠나 여행을 할 때도 따라간다. 옆에, 뒤에, 앞에, 위에, 아래에 따라 다닌다. 그리고 그의 평생 모든 일에 나서서 간섭한다. 출생을 좌지우지하며, 무덤까지 따라가 그가 죽어 묻힌 무덤 위에서 춤을 춘다. 그것들은 악랄한 주인이며, 잘못하면 무자비하고 가혹한 벌을 내린다. 그리고 모든 불행과 질병을 일으킨다.”5)

아서 웰본 선교사(1866~1928)가 34세 때인 1900년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졸업을 위해 찍은 사진
아서 웰본 선교사(1866~1928)가 34세 때인 1900년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졸업을 위해 찍은 사진

이런 세상에 기독교 선교사와 함께 성경책이 들어왔다. 한국인들은 신약성경에 자신들의 삶을 지배했던 것과 비슷한 귀신들(demons)의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에 다른 점이 있었다. 이 귀신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많은 귀신들, 수천의 귀신들은 도망간다. 갈릴리 언덕 아래로 내려간다. 맹인이 보고 그 영혼이 밝아질 때까지 그리스도의 임재에서 멀리 달아난다. 마귀들의 군대가 달아난다. 울부짖는 마귀들, 입에 거품을 물고 비명을 지르는 마귀들.”6)

신약성경의 귀신들 외에도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것이 많았다. 신들메7), 옷, 침구는 물론이거니와 상례, 결혼, 제사의 풍습과 우상숭배도 익숙한 것이었다. 서양인에게 이상하게 들리는 것들이 1900년대 초 한국인에게는 일상생활의 일부였다.

이때가 한국에 복음을 도입하기에 특히 적절한 시기가 된 것에는 다른 요인들도 있었다. 신약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제임스 게일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모국어는 확실히 세계에서 가장 쉬운 언어이다. 1445년에 발명된 한글은 먼지만 쌓여 있던 시대를 조용히 지나왔다. 무엇을 기다리며 보전되어 왔는지 누가 알았으랴?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이 언어는 너무 쉬워서 경멸을 받았다. 아, 그랬다. 심지어 여성들도 한 달이나 한 달 남짓 걸려서 배울 수 있으니 그런 값싼 언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신비한 섭리 중 하나에 의해 이 언어는 준비되었고 신약성경과 다른 기독교 서적들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모든 기독교 서적은 이 놀랍도록 쉬운 언어를 거의 독점적으로 사용해 왔다. …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도 한 달 정도면 언문을 ‘깨우칠’ 수 있고 성경을 소유하게 된다.”8)

이에 대해 조지 히버 존스는 다음과 같은 관찰을 덧붙였다:

“이러한 도덕적 삶의 음랭한 분위기 속으로 더 나은 것에 대한 빛나는 약속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왔고, 한국인들은 꽃이 해를 향하여 고개를 돌리듯 본능적으로 이 빛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경쟁자 없이 기독교는 한국 땅을 거의 독점하게 되었다. 교육 개발이나 상업 확장이 없고 대규모 군사 및 해군 개발도 없던 이 시기에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별로 없었다. 한국에는 아직 말 많은 언론과 문학이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신념과 명제를 시끄럽게 외치며 기독교와 논쟁하고 사람들의 지적 삶을 통제하는 것이 없었다. 새로운 문헌뿐만 아니라,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한 모든 정기간행물은 기독교 자료에서 나왔다. 정치적 변화와 사회 질서의 혼란은 각각 한국인들이 기독교 교회로 전환하는 것을 가속화시켰다.”9)

아서 웰본 선교사의 가족 사진
아서 웰본 선교사의 가족 사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임스 게일은 복음의 도입으로 인한 변화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무신론자의 편지를 제공한다.

“최근에 바사(Vassar) 대학을 졸업한 한 여성은 선교에 대해 개인적으로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1907년 후반에 평양에서 뉴욕에 있는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한국인에 대한 일부 작가들과 많은 여행객들의 태도는 정말 터무니없습니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제가 본 사람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이는 마치 그들이 완전히 부패하고 억압적인 정부의 발뒤꿈치에 눌려 죽은 듯이 멍한 상태로 잠들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는 가장 절실한 시기에 그들에게 다가왔고, 놀랍게 그 필요를 채워주고 있습니다. 제 태도가 얼마나 비판적인지 아시잖아요. 그리고 제가 전반적으로 선교활동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도요. 제가 어떤 불가지론적 태도를 가졌든 저는 선교가 이 사람들의 국가적 생명을 구하고 있다는 것, 기독교를 통해 그들이 다른 방법으로는 가질 수 없는 생명을 얻고 있다는 것 외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10)

“한국 선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전혀 없다. 이 사람들의 삶은 어떤 예외도 인정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명백하게 절망에서 생생한 공의로 바뀌었다. 작고 컴컴한 토담집에서 쉴 새 없이 벌어지던 언쟁과 싸움이 그칠 때마다 이웃들은 ‘누구네 누구네가 예수교를 믿나 봐요. 너무 조용해졌어요’라고 말한다. 집들이 깨끗해진 것도 쉽사리 볼 수 있다. 그리고 불과 나흘 만에 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신자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11)

이 영적으로 비옥한 땅을 향하여 아서 웰본 선교사는 항해하고 있었다. 그는 가족의 격려 없이 적은 자원을 가지고 수년간 단호히 준비해 왔던 사역에 막 착수하려던 참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결심을 인생의 동반자가 될 사랑을 얻기 위해 가장 원시적인 조건 아래 700마일 이상을 걸으면서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그는 언어와 싸우게 될 것이고 결국 장남과 막내딸을 서울에 있는 외국인 묘지에 묻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 땅과 한국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28년 후 장티푸스에 걸려 두 아이 곁에 묻힐 때까지 그 무엇도 그를 이 사역에서 떼어놓지 못했다. 이제부터 아서가 한국 땅에서 보낸 첫 2년 2개월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계속>

[미주]
1) 오륜은 오상(五常), 또는 오전(五典)이라고도 하며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즉, “부모는 자녀에게 인자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존경과 섬김을 다하며(父子有親),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고(君臣有義), 남편과 아내는 분별 있게 각기 자기의 본분을 다하고(夫婦有別),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長幼有序), 친구 사이에는 신의를 지켜야 한다(朋友有信)”는 내용이다.
2) 제임스 게일, ≪전환기의 조선≫(Korea in Transition), Young People’s Missionary Movement of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뉴욕, 1909, 99쪽
3) ≪전환기의 조선≫, 119쪽
4) 조지 히버 존스, ≪한국 땅과 사람들 그리고 풍습≫(Korea, the Land, People, and Customs), Jennings & Graham, Cincinnati, 1907, 105쪽
5) ≪한국 땅과 사람들 그리고 풍습≫, 51~52쪽
6) ≪전환기의 조선≫, 89쪽
7)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었던 신은 샌들로, 나무나 가죽으로 만든 신바닥을 신바닥에 달린 가죽 끈으로 고정시키도록 된 것이었다.
8) ≪전환기의 조선≫, 138~139쪽
9) ≪한국 땅과 사람들 그리고 풍습≫, 105쪽
10) ≪전환기의 조선≫, 241쪽
11) ≪전환기의 조선≫, 242쪽

글=프리실라 웰본 에비
엮은이=김현수 박사
미주 추가=리진만 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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