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부차 대학살' 후폭풍이 거세지고 있다. 러시아는 민간인 대량학살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지만 부차 외에도 러시아군이 점령한 우크라이나 지역 곳곳에서 민간인들을 집단 학살한 정황이 확인되고 있다.
민간인 대학살까지 드러나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평화협상은 더 어려워졌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진단이 나온다.
◆부차·브로댠카·모티진 집단학살 의혹 짙어져
4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당국은 부차를 비롯해 러시아군이 장악했던 지역에서 민간인 시신 수백 구를 수습했다며 러시아군의 집단학살 의혹을 제기했다.
이리나 베네딕토바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은 이날 국영 TV에 출연해 보로댠카가 민간인 학살 최대 피해 지역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베네딕토바 총장은 보로댠카 희생자 규모가 부차를 포함한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베르댠카는 부차에서 서쪽으로 23㎞ 떨어져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수도 키이우 인근 브로댠카 등에서 벌어진 집단학살 규모가 부차보다 클 수 있다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공개한 영상 연설에서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으로부터 탈환한 뒤 집단 매장 터와 많은 시신이 발견된 부차에서 최소 300여 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며 브로댠카와 다른 도시의 희생자 수가 훨씬 많을 수 있다고 전했다.
키이우에서 서쪽으로 45㎞가량 떨어진 마을 모티진에서도 시신 다섯구가 발견됐다.
우크라이나 당국에 따르면 이들은 손이 포박당한 상태로 절반 정도 매장됐으며, 이 중에는 시장과 배우자, 아들도 있었다. 시장 가족은 자택 인근 숲에서 매장된 채 발견됐다.
마을 인근에서도 매장된 시신이 발견되고 있어, 피해 규모는 이보다 클 것으로 파악된다.
앞서 베네딕토바 검찰총장은 전날 페이스북을 통해 지난 1일부터 키이우 인근 지역에서 민간인 시신 410구를 수습했다고 발표했다.
부차에선 대피소로 사용되던 성당 인근에 수백 명이 묻힌 공동묘지가 발견되는 등 집단 학살 증거들이 나왔다.
◆민간인 대학살에… 젤렌스키 "평화협상 더 어려워져"
민간인 대학살 징후가 잇따르면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평화협상도 난기류가 감지된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군의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으로 평화협상이 더 어려워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날 수도 키이우 외곽 소도시 부차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는 전쟁 범죄이며 국제사회에서 '제노사이드'(genocide·대량학살)로 인정될 것"이라며 "그들이 자행한 짓을 목격한 현 상황에서 대화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기자들과 만나 "러시아가 회담 절차를 더 오래 지연시킬수록 러시아에는 더 나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또 러시아군이 어린이를 포함해 수천 명의 민간인을 살해하고 팔다리 절단 등의 고문을 자행한 것은 물론 여성들을 성폭행했다고 성토했다.
우크라이나 측은 러시아군의 전쟁 범죄를 조사하기 위한 특별사법기구 설립을 승인하는 한편 민간인 대량학살 책임자에 대한 보복을 다짐하고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크렘린궁 대변인은 기자들에게 지난주 마지막으로 열린 회담이 언제 재개될지, 부차에서의 사건이 그들의 진전에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상황이 심각하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외신과 전문가들도 러시아군의 민간인 집단학살 의혹으로 평화협상 전망은 그 어느 때보다 불투명해졌다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는 "지금까지 열린 회담에서도 러시아가 이 협상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며 "부차에서의 잔학 행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회담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고 평가했다.
러시아 정부와 가까운 연구기관인 러시아국제문제협의회의 안드레이 코르투노프 사무총장도 "부차에서의 사건이 확실히 (협상) 진전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 것"이라며 "양국이 테이블에 앉아 악수를 하는 것이 힘들어졌다"고 우려했다.
그는 "회담이 중요하지만 회담은 주로 지상에서의 군사 상황에 의존하고 있으며 양측은 여전히 군사적인 입장에서 더 강력한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마련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며 "오늘 현재로선 큰 희망이 없다"고 했다.
이어 "푸틴이 단독으로 러시아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반면 우크라이나에서는 젤렌스키가 여론과 다수의 정치 행위자들에 의존한다는 사실 때문에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며 "부차에서의 사건은 그를 더욱 구속하게 만들 것"이라고 부연했다.
◆러군, 동·남부 집중포화·주요 도시 공습도 계속… "전쟁 수개월 이상 이어질 것"
러시아의 무차별 공습도 계속되고 있다. 미국 등 서방 관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동부와 남부에 집중하는 것으로 전쟁 목표를 변경했다면서도 주요 도시의 공습이 이어질 것으로 봤다.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러시아군이 키이우에서 벨라루스로 철수하고 있으며 러시아군 수십개 대대 전술부대가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에 배치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더 깊은 곳까지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으며 우크라이나의 도시인 헤르손을 장악해 물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려고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키이우와 오데사, 하르키우, 리비우와 같은 도시들은 여전히 위협을 받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이어 "전쟁의 다음 국면은 아마도 수개월 또는 그 이상 후에 측정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으로 분석한 것이다.
그러면서 "러시아는 군사적, 경제적 피해를 입히고 솔직히 테러를 일으키기 위해 나머지 지역에 걸쳐 계속해서 공습과 미사일 공격을 가할 것"이라고 했다.
설리번 보좌관은 "러시아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우크라이나를 최대한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 갈등의 다음 단계는 매우 오래 걸릴 수 있다"며 "우리는 러시아가 민간인에 대한 무자비하고 뻔뻔한 공격을 포함했고 앞으로도 계속 포함할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전술을 조정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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