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초에 조선에서는 1860년대처럼 혹독한 흉년이 다시 확산되어 농민들과 백성들의 굶주림이 극해지어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되었다.
그 즈음에 알렌 선교사가 조선에 최초로 미국공사관에 의사로 입국하여 갑신정변으로 인해 최초의 서양식 제중원을 1885년에 세웠고 그로인해 선교사들이 입경할 수 있는 발판을 구축한 그는 1887년에 주미전권 공사의 고문인 참찬관에 임명되어 미국에 가서 청나라의 외교 간섭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며 공사 설립에 기여하였다.
1890년에는 주한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어 총영사 대리를 지냈었다. 그가 그런 재임 시절에 미국에서 하와이 농장의 관리자로부터 조선의 노동자를 보내 줄 것을 요청받아 이를 고종에게 설명함으로 조선인들이 1901년 최초로 미국 하와이 노동자로 진출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인들이 고향과 조상을 떠난다는 것은 매우 부덕한 인식을 갖고 있었기에 중국이나 일본이 아닌 태평양 건너의 생면부지의 세상으로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흉년이 극심하였기에 하와이로 가면 가족의 생계 해결과 조선같이 신분 차별이 없는 세상이라는 것에 설득이 되어 인천의 내리교회교인들과 평양의 기독교인들 121명이 자원하여 제 1차로 1902년 12월22일에 제물포를 떠나 3주 만에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이어서 1905년에 일본에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빼앗기기 전까지 모두 7천 여명이 하와이에 취업차 떠났다.
1902년 최초 일진 출국에 조선 감리교 선교회에서는 홍승하 선교사를 파송하여 하와이 이주 노동자들의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1903년11월 3일에 호놀루에서 최초로 설립하여 그곳에서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평양의 장로교 출신들은 신앙노선이 맞지 않자 여기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1906년에 평양 장대현교회 설립자인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안식년차 미국으로 가던 중 하와이에 잠시 머물면서 그곳의 조선 기독교인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장로교 출신들인 교인들로부터 장로교 목사를 파송해 장로교회를 설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마펫선교사가 미국 장로교 선부에 선교사를 그곳에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물론 성사는 되지 않았다.
미국 정부에서는 하와이 노동자들이 계약 기간을 끝내면 본토로 와서 생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해줌으로 1905년부터 1915년 동안 이를 실시하여 약 1천 여 명이 미주 대륙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최초의 정착지와 취업지역은 유타주의 커넷컷빙험캐넌의 구리 광산이었으며 그곳에서 노동한 조선인들이 모두 411명이나 되었다. 그들 중에는 계약기간이 끝나면 돈을 벌어서 본국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고 미주에 남아 켈리포니아의 오랜지 농장에서도 일하면서 2세 교육을 시키며 그곳에서도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그들의 교회를 이끌어 갔다.
이당시에 켈리포니아에서는 1904년에 LA에 연합감리교와 1905년에는 상항한인연합감리교회가 센프란시스코에 설립되었으며 도산 안창호는 센프란시스코에서 신학강습소에서 영어와 신학을 강의하면서 애국 애족 정신과 기독교인의 정직과 성실한 삶에 대해 많은 강연을 하면서 활동을 하였다.
1906년에는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가 설립됐고 1919년에는 시카고한인감리교회, 1921년에는 뉴욕감리교회가 세워졌다. 이처럼 조선 기독교인들은 미대륙에 디아스포라를 이루며 나라를 잃은 백성이었지만 신앙과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미주 이민교회 역사가 120여 년 동안 미 전역에 약 3천여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미주 한인교회는 해외선교를 일찍이 시작하면서 남미권과 공산권 선교에 한국교회보다 일찍 시작하였다. 특히 중국이 1978년 개방되면서 미국 시권자 사역자들이 공산권 선교를 일찍 개척하였다. 이어서 북한 선교에도 앞장서면서 봉수교회와 칠골교회의 설립에 기여했으며 특히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고난의 행군 시에 북한 동포들에게 다양한 구제와 의료봉사 사역에도 기여함으로 동포의 사랑을 베푸는데 기여하였다. (계속)
강석진 목사(「근현대사로 읽는 북한교회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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