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모이는 교회들
미국 로스엔젤레스 밴나이스 시에서 ”그레이스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존 맥아더 목사는 비대면 예배를 전면 거부하고 있다. 그는 히브리서 10장 25절을 인용하면서, 예배금지 조치에 반대하는 설교에서, ”교회가 문을 열어야 하는 임무“를 강조했다. 그는 미국의 법조항에 근거하여 이 지구상의 어느 국가 권력이라 하더라도 교회의 예배 모임을 금지하거나, 제지할 권한이 없음을 주장했다. 결국 이러한 입장을 견지한 소송들에 대한 판결들이 나왔고, 대부분 교회가 승소했다. 필자는 이것이 오직 교회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입장에서 나오는 무리한 주장이자, 성경의 왜곡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목회자로서 본인의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에게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직무일 것이다.
다만, 필자는 히브리서의 이 한 가지 본문만을 가지고, 엄중하고도 기계적으로 적용해야 할 중요한 명령으로 내세워서, 교회에 출석하여 드리는 예배 모임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강조하는 교회의 예배 모임에 불참하게 되면, 공적인 예배를 통해서 공급받는 역동적인 은혜를 받을 수 없음에 대해서 보다 더 주목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지만, ”코비드-19 대유행“이라는 초유의 위기 상황 속에서, 수백 명, 수천 명이 모이는 주일 오전 예배가 방역 당국의 지침을 어기는 무리수가 된다는 점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극심한 충돌과 양쪽의 입장 차이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교회는 마냥 두 손을 놓고 정부당국의 예배 금지에 따라가야만 하는가?
교회는 사람의 권위에 복종하기 보다는 하나님에게 복종해야만 한다(행 5:29).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파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연합하여 성도들이 모이는 예배를 명령하였고, 성도는 마땅히 따라가야만 한다.
성도들은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다 같이 함께 모임 속에서 서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히브리서 10장 22절은 성도 사이의 사랑과 교제를 매우 중요하게 강조했다. 이것이야말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증거가 된다. 성도들 사이의 인격적인 교제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다.
앞에 살펴본 히브리서 본문의 맥락에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고, 돌아보는 일에 명령을 받았다. 이러한 영적인 교제와 격려의 상황들은 교회에서 모이는 집회를 통해서 성취되어지는 것이므로, 비록 모임을 가지라는 것은 명령이 아니고 권고라 하더라도, 모이기를 폐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성도의 궁핍과 부족함을 외면하는 것은 성경적 교회가 지향할 목표라고 할 수 없다.
교회가 모임을 갖지 않으면, 우리의 재림 신앙과 하나님 중심의 삶은 황폐한 상태로 변질될 것이다. 반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경건한 모임을 갖고 간절히 기도하는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마냥 고난과 슬픔 속에 버려두시지는 않는다(히 13:5). 우리 성도들 사이에서도 교회의 다른 동료들을 무시하거나, 그냥 간과할 수 없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와 의견이 심하게 차이가 나거나, 서로 느끼는 감정이 크게 차이가 난다고 해서, 교회를 떠나버리는 행위를 금해야 한다. 이것은 너무나 개인주의, 이기주의, 자아집착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다른 성도에 대해서 무관심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거역하는 행위이자, 배교의 행위와 같은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25절에 나오는 ”모임“은 과연 무엇을 위한 집회인가? 여기에 ”교회“라는 단어, ”에클레시아“가 사용되지 않았음에 유의하여서, 성도들에게 참석하도록 격려하는 모임은 아마도 각 지역의 회당(synagogue)에 속한 기독교인들의 추가적인 집회와 모임이라고 해설하는 주장도 있다. 이미 문맥에서 채택된 단어를 검토하면서, 교회라는 단어가 없으므로, 혹시 회당에서, 즉 아직은 교회로는 완전하게 차별화가 되어진 모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어쩌면 초대교회의 모임은 회당 주변에서 모이던 작은 공동체의 회합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자주 언급되어졌듯이, 초창기 교회는 이방인들의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고, 흩어진 유대인들이 모이던 회당과 같이 작은 모임을 통해서 발전하였다. 주후 70년경, 예루살렘이 무너진 후, 가이사랴, 안디옥, 에베소, 로마 등 사도들은 여러 형태의 초대 교회를 건설해 나갔다. 사도 바울은 수없이 회당에 들어가서 전도했었다. 초기 형태의 교회가 자리를 잡아갈 무렵에,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성도들은 회당에 모였을 것인데, 아마도 각 지역에서 교제의 모임을 가졌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회당“이라는 장소도 역시 오늘날로 말하자면, 유대인들의 지역별 종교집회소였는데, 초대 교회의 예배당 규모는 이들보다 훨씬 적었다. 이방지역에 살던 유대인들 상당수가 사도 바울처럼 기독교인으로 개종했을 것이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배경과 당시 상황에 근거하여서, 히브리서 10장 25절에 나오는 모임이라는 것을 이렇게 회당 집회 이후의 소그룹 모임으로 해석할 때에도 명확하게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으리라 추정되어지는 ”회당“이라는 단어도 역시 여기 본문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초대교회는 회당과는 정체성이 완전히 달랐다. 그 두 그룹은 서로 본질상 완전히 다른 공동체였다.
히브리서 10장 25절의 모임을 ”가정집에서 모이던 교회의 집회“, ”가정교회“(house church)로 해석하는 신학자도 있다. 비록 초대교회 시대에는 교인들의 규모가 아주 작았을지라도, 또한 그들이 모이던 장소도 역시 비좁고, 열악한 곳이었든지 간에, 혹 신앙심이 돈독하면서도 약간 넉넉한 중산층의 집이었을지라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공적으로 인정된 장소였을 것으로 본다.
초대교회는 ”가정교회“였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한다“고 하였다(고전 16:19). 로마서의 말미에서는 ”그들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도 문안했다(롬 16:5). 초대교회 시대에는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이는 대형 교회는 없었다. 그래서 브루스 박사도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으로 ”가정 교회“의 모임일 수 있다는 여지를 열어놓았다. 각 지역마다 여러 곳에 흩어져서 모이던 작은 교회들이 있는데, 일부 성도들은 각기 다른 지역에 모이던 모임을 무시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교회의 초기 역사를 증거 하는 자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예루살렘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도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모였었다(행 1:13).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의 체포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기도하였는데, 그가 석방된 직후에 제일 먼저 찾아간 곳도 역시 그 작은 교회였다(행 12:12).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는 비록 작지만, 이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을 체험하였다.
초대교회가 가정에서 모이는 경우에, 가정 교회는 숫자는 대략 오십여 명 안팎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가정의 헌신으로 마련된 예배와 기도의 집회 장소들에 모여서 서로 돌아보면서 격려하고, 소속된 성도들끼리 긴밀한 연대를 갖고 있었다. 비록 건물은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각 도시마다 은혜를 입은 성도가 제공하는 가정교회가 왕성하게 세워져 나가고 있었다. 여러 곳에서 작은 가정에서 모여서 차츰 구체적으로 형성되어진 초대교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에 기초하였다. 그 도시 안에 거주하는 성도들 사이의 교제와 연대의식이 매우 긴밀하였다. 때로는 전체가 큰 규모로 모여서 예배와 교훈을 듣기도 했을 것이다(행 5:12, 19:9).
가정교회의 집회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일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였다. 예배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에 초점을 두고 시행되는 경배의 시간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따라서, 예배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이다. 또한 이렇게 예배로 부르시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은혜와 복을 내려주시고자 하심이다(히 11:6). 예배에 참석한 성도가 생명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경건의 체험 현장이기도 하다.
참된 성도는 교회에서의 예배로 나아가 함께 경배를 올리는 모임을 포기할 수 없다. 히브리서에서 지적한 바, 아주 오래전부터 거짓 신앙을 가진 자들은 함께 모이는 성도의 교제와 공적인 예배 모임을 포기해 버렸다.
교회 안에서 교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수직적인 차원과 동료 성도들과 만남을 통해서 수평적 교제로 이뤄진다. 성도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 땅위에 살아가는 동안에 육체의 더러운 것과 인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으로 휩싸여 있다. 성도는 이런 것들에 빠진 자들과 확고하게 단절해 버리고, 오직 믿음을 가진 자들과 교제를 통해서 하늘나라의 위로와 상급을 소망해야만 한다.
믿음의 공동체는 사탄의 계략 때문에 거짓 교훈들로 속임수에 넘어가기도 하고, 함정에 빠지기도 하고, 심각한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이단들이 감언이설로 속이는 자들에게 넘어가기도 한다. 성도들은 영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고 침체에 빠지거나 영적인 무력증에 휩싸일 수도 있다. 불신앙의 미혹에 넘어가게 되면,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거나, 은혜의 감격이 소멸되어지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데, 이런 것들이 습관적으로 되어 버린 자들도 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오고 있을수록,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교회에 모이는 집회를 멀리하는 자들이 늘어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라고 탄식하였다. 초대교회의 모임은 이러한 주님의 경고를 기억하고 깨어있으면서, 믿음을 강화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말씀에 따라서 예배하고, 교제를 나누던 공동체였다. (계속)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 명예교수,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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