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신앙생활을 살펴보면,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종말을 향한 신앙인의 태도와 자세이다. “그 날이 가깝다”는 인식이 가장 중요한 열쇠를 갖고 있음에 주목해야만 한다.
가장 정확한 영어 성경번역으로 알려진 ESV 신약성경에는 ‘그 날이 가깝다’는 구절을 “아주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그 날”(the day drawing near)이라고 번역되었다. “아주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그 날”을 대비하려는 성도가 깨어서 준비하려고 다 함께 모이는 일에 열심을 냈던 것이다. 이처럼 히브리서에는 종말 신앙의 언급이 깊이 배어있다.
또한 조금 뒷부분에 해당하는 히브리서 12장 22에서는 성도가 소망을 갖고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을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히브리서 12장 18-29절에서는 “시온산”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 “하늘의 예루살렘” “하늘의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 등을 “교회”(히 12:23)와 동등한 개념으로 열거한다. 모두 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자취와 흔적들이 사용되었던 것들인데, 모두 다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요, 결국에는 미래에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를 표상적으로 알려주신 것들이다. 히브리서 12장 18절이 지적하듯이 “성도들이 모임을 가지는 곳”은 “교회”이자, “천국”의 영역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약속의 성취를 사모하면서,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자고 격려한다.
그러나 초대교회 시대에 살던 성도들이라고 해서, 모두 다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승리하신 주님의 재림 신앙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곧 오실 것이라고 기대하였던 주님이 오시지 않고 하루하루 지나가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머지않아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었던 기대가 성취되지 않자, 차츰 늦어지게 되면서 일부 믿음이 약한 성도들 사이에서는 신앙생활이 흐트러지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일부에서는 성도들 간의 모임에 나오지 않으면서, 아예 “습관”(habit)이 되어서 교회에 전혀 나오지 않는 자들이 있게 되었다. 그들의 신앙은 돌처럼 굳어져 버렸다. 그러한 자들은 성도들의 모임에 결석하는 일이 그만 습관이 되어 버렸다. 참석을 중단한 자들의 경우에는 믿음이 작동 중지 상태에 빠지고 만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다 같이 한자리에 모이는 데에 힘을 썼던 이유는 “말세”가 가까이 온다고 생각하면서, 철저한 준비를 실천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가졌던 재림신앙은 생활의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매우 역동적인 삶을 영위하는 원천이 되었다.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 보다는 주님의 나라에서 살아갈 소망을 더욱 더 확실히 하고자, 모여서 힘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신앙교육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 43절에 언급하신 바와 같이, 사도들은 “도둑같이” 아무도 모르는 순간에 찾아올 재림의 날을 준비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재림 신앙을 확고하게 정립하기 위해서는 함께 그 소망을 나누는 성도들 사이의 격려, 신앙공동체인 교회의 모임이 중요하였다.
베드로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재림을 바라보면서, 긴장감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벧후 3:9-12).
초대교회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재림이 곧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었다. 곧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임한다”는 사도 바울의 종말신앙은 그의 전체 서신 속에 광범위하게 스며들어 있는 중요한 교리였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9-23절에서 피조물의 질서가 회복되는 새로운 날에 대한 소망을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절에서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고 하면서, 사도 바울은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할 수 없으리라”고 경고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종말론에는 영원한 구원이라는 소망이 광범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때로는 핍박과 비난이 가해져도, 참음으로 기다리자는 격려를 서로 간에 나누고 있었다. 특히 바울 사도는 몸 안에 영혼이 깃들이듯이,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내재하시면서, 이 땅이 영원한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깨우쳐주신다고 하였다. 주의 영은 우리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록 인도하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살후 2:1-2)
초대교회 성도들의 예배와 모임은 종말신앙에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심각한 배교의 상황에 직면하였다. “불법의 사람”(살후 3:3)이 예수님의 재림 이전에 나타나서,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높이고, 숭배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성경주석자들은 로마 황제 칼리굴라가 주후 40년에 자신의 얼굴을 황금 신상으로 만들어서 예루살렘 지성소에 세웠던 것을 지적하고 있다. 로마 제국의 황제숭배가 절대 신앙으로 강요되면서, 교회는 큰 위기를 맞이하였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다 같이 모임을 유지하려고 격려했던 이유는 믿음의 다짐을 새롭게 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교육하고, 양육하고, 온전케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믿음에 관한 교훈들을 더욱 더 확신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히브리서 10장 25절에서, 성도들의 모임이 과연 어떠한 목적으로 유지되어 나갔던가에 주목해야만 한다. 이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려는 마음으로 모임을 갖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승리하신 주님의 왕권을 초대 교회의 신앙내용으로 각인되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1장 20-23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가르쳤다. 비록 복음이 완전히 세상을 정복하는 시기에 대해서는 낙관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가 성도의 완전한 성화이자 구원받을 성도의 모델이라는 점을 확신하였다. 그들이 사회적인 차별과 정치적인 압박, 재물이 없어서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 있더라도, 최후 심판에서 의로우신 재판장이 의인으로 인정할 것을 확신하면서 서로 격려하였고, 승리를 고대하였던 것이다.
종말론적인 모임을 강조하는 히브리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전반적인 앞 뒤 문맥을 살펴보자. 히브리서 10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과 속죄를 확고하게 믿어야 할 것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히브리서 10장은 구약성경의 옛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으로 전환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시대의 모든 제사 규정들, 즉 제사장들의 제도, 회막, 동물제사 등 여러 요소들 가운데 상징적으로 담겨져 있던 제사장의 임무를 완전히 성취하신 것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해서 예비해 놓은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고난을 직면했을지라도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켜나도록 격려를 받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구원을 아는 자들에게는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영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지만, 하나님의 뜻에 반항하는 행동을 택하는 자들도 있다.
이제 조금 더 본문을 좁혀서 한 구절에 집중해 보자. 히브리서 10장 19-25절은 히브리서의 두 부분을 연결하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 주제들로 상호 결속이 되어진다. 그 앞에 나오는 모든 내용은 새 언약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생활을 격려한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히브리서 10장 25절은 믿음의 길에서 떠난 자들의 실상을 드러내어 심각한 경고를 하고 있는 부분이다.
물론, 히브리서 10장 25절을 가지고, 오직 공적인 예배 모임에 나오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단정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불치의 질병을 가진 환자나 장애인이나 혹은 핍박을 당하는 중에 있는 성도, 또는 전쟁의 위험 상황에 있다면, 집회에 나올 수 없다. 그러한 여려가지 예외적인 경우에는 성도가 개인적으로 경건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유행하는 위기의 시대에서도 특수한 상황들은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성도들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특수한 형편들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일 오전 예배 시간에 모두 다 교회로 모여야만 한다고 명령하신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앞으로 안식일 성수의 조항들을 검토하면서 이러한 예외 조항들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논의되고 있는 내용들을 간추려 보자. 먼저, 이 본문에 명확하게 “교회”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는 신학자도 있다. 그래서 여기서 모이는 모임이 교회에서 소집되는 예배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인데, 기본적으로 “모임”을 의미하며, 헬라 도시 국가에서 “백성들의 회합”을 뜻하는 “민회”라는 단어에서 기인했다. 더구나 초대교회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박해 속에서 비밀리에 집회를 가졌다. 공개적인 교회가 아니라 지하교회에 모여서 예배와 성례, 기도와 교육, 권면과 격려, 구제와 자선 등을 함께 나눴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을 통해서 유무상통하고 서로 영적인 교제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므로, 우리가 히브리서 10장 25절에 나오는 모임을 단지 예배만을 위한 집회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사도행전이 증거하듯이, 초기 신앙공동체의 모임에서 사도들의 말씀과 기도, 찬양과 기원, 성례와 고백 등이 가장 중심된 일정이었기에, 이들의 모임은 당연히 교회의 활동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순리이다. (계속)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 명예교수,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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