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저는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분의 실존하심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통해 구원해주셨다는 믿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거나 세속적인 행동을 할 때나 어쩌다 죄를 범하게 되면 극도의 죄의식을 갖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벌 받을 것 같은 공포심도 듭니다. 그런데도 저에게 죄성은 남아있고 의지가 약해 온전히 끊지 못합니다. 죄인 줄 알면서도 저지르는 고범죄라 여겨져 더 큰 죄의식이 저를 짓누릅니다.

처음에는 “이런 죄를 지었는데 구원 받을 수 있느냐?”에서 시작된 의문이 불안으로 점점 커지기에 인터넷에서 관련 글들을 찾아서 읽었습니다. 그러다 행위구원론에 대해 알게 되었고, 계속 파고들다가 “행위 있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여겨져 더 불안해졌습니다. 구원받는 크리스천이 10~20%에 불과하다는 말까지 들으니 더 무서워지고 혼란해집니다.

[답변]

죄과(罪過)를 옮기고 기억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박진호 목사
박진호 목사

“여호와는 자비로우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시리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罪過)를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8-14)

하나님은 자비가 영원하고 풍부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를 따라 일일이 벌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신자를 포함하여 이 땅에 살아남을 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이 시를 지은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표상이 되는 의로운 왕이었음에도 이런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대신에 동(東)이 서(西)에서 먼 것같이 죄과를 멀리 옮기셨다고 합니다. 동과 서는 영원히 만나지 못합니다.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죄과에 더 이상 문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인간의 체질이 진토임을 아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죄의 본성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음을 당신께서 더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며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31:33-34)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베푸실 새 언약에 관해 예언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도 아니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이가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당신의 사역과 가르침과 십자가 죽음에서 다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과대로 처치하지 않으시고 끝없는 인자로 용서해주시는 분임을 예수님을 통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분의 은혜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자의 죄과를 하나님이 기억도 않습니다. 아니 그 전에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던져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정말 문자 그대로 복음(福音, Good News)입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에서부터 그 구원이 어떤 은혜를 지니기에 좋은 소식이 되는지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켤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주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의 죄 값을 다 치렀다는 확신이 있고 그래서 앞으로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헌신한 신자에게는 더 이상 심판이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한 번 주신 구원이 취소되는 법도 절대 없습니다.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나님 당신의 입으로 분명히 선언하셨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가장 기본적 의미

따라서 예수를 믿었다는 가장 기본적 의미는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과를 자신의 성품, 자격, 공로, 능력, 선행은 물론 세상에 통용되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아무리 씻으려 해보았지만 모두 완전하게 실패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런 절망에 빠진 나를 하나님께서 무한하고 조건 없는 긍휼에 따라 예수님의 십자가 의로 덧입혀서 용서해주셨다는 사실을 성령의 간섭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죄의 본성은 생생하게 그대로 살아있는 죄인의 상태에서 당신의 자녀로만 받아 주신 것이 구원 받은 의미입니다. 완전히 죄를 짓지 않을 거룩한 성자로 바꾸어서 구원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용서 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이 땅에서 완벽하게 죄를 안 지을 수 있다면 그는 바로 하나님입니다. 실제로 성자 예수님 외에는 죄를 짓지 않은 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 믿고 사도가 된 자들도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 신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이방인 신자들을 물리치는 위선을 보였습니다.(갈2:11-14)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비겁함에서 여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선교동역자 바나바와 크게 싸우고 헤어졌습니다. 주안에서 하나 되지 못하는 죄를 범했습니다.(행15:36-41) 자기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없애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대체로 간질병으로 인한 발작으로 보지만, 스스로 사단의 사자라고 표현했듯이 비록 고범죄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역에 크게 훼방이 되는 허물이라고 여겼던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짓는 죄로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자기 속의 죄의 본성과 싸우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3,24) 그러니까 사역 말년임에도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딤전1:15)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약 시대 이후 신자들 가운데서 사도가 된 후의 바울보다 의로운 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 중에는 저와 질문자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바울이 여전히 죄를 짓고 있었지만 질문자처럼 죄책감에 빠져 구원 받지 못할까라는 두려움에는 휩싸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문자 그대로 복음이라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한탄한 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A)고 고백합니다. 주님이 자기 죄과를 다 옮기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뜻입니다. 또 성령님의 인도로 죄의 법과 싸워서 이겨나가겠다는 뜻입니다. 자기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라고 실토한 후에도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셨다”(딤전1:16)고 합니다. 일차적으로는 예수 믿기 전의 상황을 말하지만 그 후에도 동일한 의미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믿기 시작했다”는 의미는 도무지 씻을 길이 없는 내 죄를 성자 하나님의 보혈로 깨끗케 해주셨기에 지옥으로 보내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또 예수를 “믿고 있다”는 의미는 그럼에도 죄의 본성은 살아 있기에 이제는 천국으로 입성할 자녀답게 거룩하고 의롭게 살기로 결단, 헌신,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 의로움의 실행은 느리고 수시로 죄에 넘어져도 여전히 나를 위한 천국의 영광은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완전히 보장되어 있음을 확신하는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행위구원을 절대적으로 부인하는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의미는 말하자면 하나님 당신께서 행위구원을 완전하고도 철저하게 부인한다는 선언입니다. 행위 구원이 가능할 것 같으면 구태여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모든 죄 값을 감당하며 십자가에 죽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가만 놔두었다 죽은 후에 그 행위로 구원 받을 만한 사람들을 구원해주면 그만입니다.

예수님 이전에는, 아니 지금까지도 유대교를 비롯해 세상의 모든 종교가 행위구원을 표방합니다. 주님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님을 알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무 죄 없으심에도 그 죄의 형벌을 다 감당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께선 절대로 인간의 행위에 따라 상과 벌을 주지 않는다고 확실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진토 같은 체질을 성숙하게 바꾸어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기에 신자는 예수를 믿었음에도 여전히 연약한 가운데 있습니다. 스스로는 도무지 죄를 씻을 길도 없고 다시는 죄를 안 지을 만큼 완전히 거룩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죄를 지었다고 이미 주신 구원을 취소하면 어떻게 됩니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짊어지셨던 골고다 십자가가 완전히 무용지물이 됩니다. 당신께서 다 이루신 구원을 스스로 다시 부인하는 꼴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예수 믿었다고 영생을 추가적 보상으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 구속 안에 들어왔음을 아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행위구원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지옥의 갈 형벌을 완전히 영원토록 제거했다는 사실도 알게 된 것입니다. 지옥형벌이 이미 완전히 제거되었으니 영생은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가 되었기에 죽은 후에도 그 관계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불신자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그 대가로 지옥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신자가 심판 받지 아니하므로 영생이 필연적 결과이듯이, 불신자는 아예 불가능한 행위구원에만 집착하기에 예수님의 은혜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십자가 구원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심판은 필연적 결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전혀 회복되지 않았기에 죽은 후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죄책감을 이겨내는 유일한 길

요컨대 예수 믿어 구원 얻은 것은 죄의 형벌에서 구원 받은 것입니다. 죄 자체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전혀 아닙니다. 죄와 싸워가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책임은 신자에게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구원이 취소되는 심판”은 절대 없으나, 믿은 후에 짓는 “죄에 대한 징계”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징계도 죄 지을 때마다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회개치 않고 계속 고의적으로 죄를 범할 때만 그러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징계이지 심판이 아닙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이게 없으면 사생아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히12:7-10)

인간 아버지도 자식 잘 되라고 징계합니다. 인간은 자칫 자기 욕심과 감정에 치우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오직 신자의 유익과 당신의 거룩함에 참예케 하려고 징계를 하신다고 합니다. 징계를 하지 않으면 참 아버지가 아닙니다. 신자는 이미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자녀를 내치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인간 아버지도 잘못할 때마다 야단치지 않습니다. 두고 보고 있다가 스스로 고치지 않거나 도가 지나칠 때 야단칩니다. 하나님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일일이 징계하면 독재자 폭군에다 기계적인 하나님이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믿음을 강요하지 않으며 우리 상태에 비례해서 영적 상벌을 주는 분도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며 심지어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을 의미와 가치가 없습니다.

이런 징계마저 피할 방도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떤 일에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인간은 지구상에 영원토록 없습니다. 목사인 저도 부끄럽게도 매일 몇 번씩 죄를 짓습니다. 심지어 죄를 짓고도 모를 때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뻔뻔하게 잘 살고 있는 까닭은 바울처럼 오직 일절 오래 참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저를 건질 자는 성령님으로 그분의 인도로 십자가 복음의 은혜로 되돌아가는 것만이 제가 다시 살 수 있는 길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10)

죄책감이 들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회개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스스로 그 죄를 이기려 노력하셔야 합니다. 이제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기기 힘들다는 진리를 알기에 성령님이 나를 주장해달라고 진심으로 간구하셔야 합니다. 성경을 통독하면서 십자가 복음의 은혜를 배워야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예수님께 자신의 전부를 의탁해야 합니다. 진리인 그분을 알면 자유로워집니다.

신자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것은 사탄의 훼방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의지적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정확히 배우고 그 진리를 온전히 붙들어야 합니다. 그 진리가 내 존재와 삶과 인생에서 실제로 진리 됨을 체험케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성경 말씀을 배우고 묵상해야 합니다.

요컨대 예수 믿은 후에 죄를 지은 것은 허물이 아닙니다. 죄책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 더 큰 죄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면 그런 죄책감에 빠지려 해도 빠질 수 없습니다. 복음에 대한 깊은 깨우침은 물론 실제 삶에서 세밀히 체험하는 은혜가 질문자에게 속히 임하길 기원합니다.

(참고로 교회 안에 구원 받는 크리스천이 10-20%에 불과하다는 것은 현재 죄를 전혀 안 짓는 신자의 숫자가 그렇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는 열심히 오래 다녔어도 아직 십자가 복음의 진리 됨을 모르고 그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자의 숫자가 의외로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2014/7/21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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