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관악구 낙성대 소재 사랑교회로 가는 길은 험했다. 낙성대 전철역 인근이 아니라, 인근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04번 버스를 타고 15분을 더 가야 했다. 인헌 시장을 거쳐 인수당 약국 정류장에 내리자, 평범하고 한적한 주택가가 펼쳐졌다. 이리 저리 둘러봐도 교회는 찾을 수 없었다. 어딘지 몰라 또 전화를 걸 찰나, 김효덕 목사가 먼저 기자를 반겼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개혁정통 사랑교회 김효덕 목사가 첫 번째 주인공이다. 교회가 위치한 상가 지하로 내려가자, 초여름 날씨에 땀으로 흥건했던 등이 서늘해졌다. 조용했고 그래서 마음도 영혼도 차분해졌다.
지하 개척 교회를 시무하는 김효덕 목사, 실상 그의 인생은 꾀나 화려했다. “그런 만큼 롤러코스터처럼 굴곡졌다”고 첫말을 뗀 김 목사. 그는 20년 전 KET라는 IT 벤처기업 사장이었다고 한다. 20시간 동안 일 했던 일 중독자였다. 김 목사는 그저 ‘쓸 돈만 넉넉히 부인에게 주면 되겠지’라는 생각 속에 가정은 등한시 했다고 한다. 그리고 2000년 초반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가전제품 박람회인 CES 까지 준비할 정도로, 그의 벤처는 승승장구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시련이 찾아왔다. 그의 부인이 직장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일본 도쿄 나리타공항에서 태평양 상공을 지나는 비행기 속에서, 점점 숨이 막혀 왔다”며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하자 1시간 버티는 게 어려웠다”고 그는 고백했다. 암 진단 받은 아내 걱정 때문에 몸도 마음도 짓눌려 왔던 것이다. 심지어 스트레스 때문에, 그는 “한국에 돌아가면 바로 죽고 싶다는 생각 뿐 이었다”고 술회했다.
이후 그는 “한국에 돌아갔는데 여전히 두통은 심했고, 지하철에서 사물도 두 개로 보였다”며 “이윽고 쓰러지기 까지 했다”고 기억했다. 이어 그는 “병원에 가보니 아무 이상이 없다는 진단만 되풀이 했다”고 고백하며, 설상가상으로 KET는 부도를 맞게 된다. 갑자기 신용불량자가 된 김 목사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경기도 광주의 한 기도원에 찾아가게 된다. 거기서 그는 한 목사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는다.
“목사가 돼셔야 해요. 하나님께서 김효덕씨에게 은사를 주셨어요”
당시 그 말을 들은 그는 “나이는 50살이고, 신학교에 입학해 공부하기가 꺼려졌다”며 “신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렇게 10년을 보냈다“고 고백했다. 그런 와중, 그는 병원에서 진단을 받는다. “전립선에 두 개 결절이 있다고 의사는 내게 말했다”며 “조직검사를 받고 암 진단 받으면 내 인생이 끝날까봐, 의사에게 조직검사는 6개월 후에 미루자고 간청했다”고 그는 술회했다. 그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6개월 동안 기도에 목숨을 건다. 밥 먹고 기도하고, 밥 먹고 기도하고 하루 종일 기도에 매달렸던 김효덕 목사.
“처음에는 1시간 기도하기가 너무 어려웠다”며 “그러나 점점 기도가 쌓이다 보니 3시간, 6시간은 가볍게 하게 됐다”고 그는 밝혔다. 이어 그는 “기도에 침잠하다 보니 심지어 집에서 기르던 개가 손을 물어도 모를 정도였다”고 또한 고백했다. 병원 가서 수술 받을 정도로, 신경이 드러난 심한 상처였다. 병원에 도착하자, 의사는 그의 팔을 감던 붕대를 푸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붕대를 감았다. “상처가 이미 다 아물었다”며 말이다. 김 목사는 “어제까지 상처가 심했던 부위가 어떤 치료 없이 다 아물었던 것”이라며 하나님의 치유 경험을 털어놓았다.
이를 계기로 김 목사는 본격적인 치유 사역을 시작하기로 했다. 어떤 사람이 체 했다고 그에게 가면, 명치에 손을 대고 기도하는데 체기가 금새 가라앉았다. 그에게 치유 기도를 요청하면, 변비도 낳고, 여러 가지 병들이 치유됐다. 치유 은사를 확신했다. 본격적인 사역을 하려던 찰나, 뜻밖의 장애물이 그를 기다렸다. 당시 전도사로 사역했던 교회의 담임 목사는 그에게 '치유 사역을 하지 말라'고 강권한 것이다. “교회는 질서가 있고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려 했다”고 그는 술회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그 교회에 다니던 암 환자는 울면서 내게 매일 찾아와, ‘암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다”고 했다.
당시 암 환자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말기 암 진단 받고, 고작 1년 정도의 시한부 인생이었다. 매일 항암치료로 연명하며, 스트레스는 그를 공황장애로 까지 몰고 갔다. 그렇게 고통에 겨웠던 암 환자를 위해, 김효덕 목사는 매일 1시간 씩 치유 기도를 해주기 시작한다.
그는 “교회 권고와 환자 간청 사이에 고민이 됐다”며 “결국 교회를 나오고 그 친구를 위해 매일 기도해주기로 결정했다”고 고백했다. 김효덕 목사의 기도를 받던 암 환자는 공황장애의 치유를 경험했다. 항암치료로 인한 고통은 50%나 감소됐다고 한다. 그렇게 1년 시한부 인생을 판정 받았던 암 환자는, 2년 8개월 정도 살며 숨을 거둔다. 의사들도 기적이라고.
그러나 정들었던 암 환자의 죽는 모습을 보면서, 김 목사는 “죽는 모습을 직접 보니, 상실감과 더불어 죽음의 공포 때문에 두렵고 무서웠다”고 술회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 담대한 마음을 달라고 뜨겁게 기도했다”며 “설사 치유 사역을 하던 중, 암 환자가 죽어도 담대한 마음을 달라”는 당시 기도 내용을 고백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하나님이 모든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신유은사를 주신 게 아니”라며 “의학 기술도 은사로 주셨기에, 치유 기도와 같이 병행하는 게 좋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그는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사는 항암치료로 인한 공황장애를 막는 것”뿐만 아니라, "우울증, 조울증 등 정신과적 질환도 그 대상"이라 고백했다. 특히 그는 “병원에서 명확히 진단이 안 되는, 신경증적 치료 요소도 포함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그는 “신경 안정제 투여나 명확한 진단명을 알 수 다양한 질환을 지닌 사람들이 내게 치유 기도를 부탁 한다”고 전했다. 덧붙여 그는 "치유기도 받으면 세포 재생력이 향상된다"며 “항암 치료와 함께 공황장애 등에 대한 치유기도를 같이 받으라"고 권유 했다.
치유 사역을 계속 하던 김효덕 목사에게, 낙성대 사랑교회를 개척한 계기에 대해 물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계속 치유사역을 하던 중,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진로를 놓고 가족들과 상의했다”고 전했다. 만일 직장 다니는 아들 둘과 아내가 개척교회 사역에 동의하면 시작하고, 아니면 말자는 생각이었다. “10년 정도 집에서 돈도 못 벌었기에,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미안했고 기대는 하지 않았다”고 고백한 김효덕 목사. 그러나 “의외로 가족들이 개척 사역에 동의를 했다”고 그는 고백했다.
낙성대 전철역 근처도 아닌, 상권에서 거리가 먼 곳에 자리한 연유도 궁금했다. 그는 “내가 서초동에 30년 살았다”며 “돈 많은 후배들도 있고, 그곳에서 개척하면 성공할 것이란 생각도 했다”고 고백했다. 다만 그는 “10m 마다 교회가 2-3개 있었다”며 “교회 끼리 경쟁하는 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결국 그는 “장소를 물색하다 주변 교회와 거리가 있는 곳을 알아보니, 여기 낙성대 인헌 시장 근처로 결정한 것”이라 덧붙였다.
현재 낙성대 인헌 시장 근처에 위치한 사랑교회는 교인 20명 남짓이다. 그리고 치유 및 영성 훈련받기 위해 사례비 없이 일하는 부교역자 3명이 있다고 한다. 부목사로 2명이 더 지원하기로 요청한 상황이다.
김 목사는 개척교회와 대형교회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그는 “대한민국 기독교는 대형교회만 찾는다”라며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교회 건물의 화려함 및 목사 명성만 첫째로 삼는 신앙은 분명 문제다”라고 역설했다. 도리어 그는 “큰 교회에 갔지만, 권력과 물질을 위해 신앙 한다면 이는 우상숭배”라고 직언하며, “1등주의, 권력 및 물질 축복이 거꾸로 저주가 될 수 있다”고 경계했다. 즉 그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이웃에게 나눈다면 그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며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아, 거룩에서 멀어졌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신앙의 목적은 영혼이지 이 땅의 부귀영화가 아니”라고 역설했다. 그는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며 “작고 허름한 개척교회라 해도, 심지어 화장실에서 밥을 해먹는다 해도 진짜 복음·믿음이 있다면 희락과 평강이 있다”고 전했다.
아울러 그는 “신앙에 있어 믿음이후 성화가 중요하다”며 “그런 점에서 목사와 성도 간 긴밀한 관계는 필수”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인격적 관계 안에서 목사의 영적 지도를 받으며, 성도는 영적성장과 발전을 이뤄가는 것”이라 강조했다. 때문에 그는 “신학교 졸업 후 곧바로 현실을 쫓아 중·대형교회만 가려하지 말고, 목자와 성도 간 영적 성장을 위해 개척에 헌신해 보라”고 조언했다.
물론 그는 “지금 개척교회 세우면 10개 중 9개는 망하는 현실”이라고 첨언했다. 그럼에도 그는 “한 영혼 살리기 위해서라도,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며 “망해도 하나님 뜻, 성공해도 하나님 뜻”이라고 역설했다. 나아가 그는 “9개의 망하는 교회 반열에 들까봐, 무서워 개척을 그만둔다면 차라리 목사 안수 안 받는 게 낫다”고 했다. 무엇보다 그는 “사도행전 교회는 ‘뭉치고, 모으고, 세우는’ 역사가 아니”라며 “끊임없이 흩어지는 개척의 연속이기에, 환경과 상관없이 예수의 길을 쫓는 게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끝으로 그는 “요한 계시록 3장에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고 말씀하셨다”며 “이는 안 믿는 사람보다, 믿는 성도를 향한 예수님의 교제 요청”이라고 전했다. 따라서 그는 “어떤 지도자 없이, 하나님과의 교제 및 영적 성장을 이루기 어렵다”며 “하나님은 인격체이시듯, 소규모 그룹 안에서 목자와 성도 간 인격적 관계를 통해 영적 배가를 이룰 수 있다”며 개척 교회의 강점을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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