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기독교통일학회는 제25차 정기학술 심포지엄으로 ‘3·1운동과 통일 - 기독교적 관점에서’를 개최했다. 16일 오전 10시부터 사당동 생명나래교회(담임목사 하광민)에서 열렸다.
1부 예배 순서가 있었다. 설교로 김상복 할렐루야 교회 원로 목사는 요한복음 8:31절을 놓고 ‘보편적 가치’란 제목으로 전했다. 그는 “3.1운동의 성공 요인은 독립, 자유, 인권, 평등,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했기 때문”이라며 “그 역할을 기독교가 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진리는 이런 보편성을 추구 한다”며 “기독교가 이런 보편적 가치를 추출해, 3·1운동을 이끌었기에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강조했다. 때문에 그는 “한국교회가 이런 보편적 가치를 디딤돌 삼아, 비 기독교인들에게도 통용될 수 있는 언어로 통일 운동을 하자”고 당부했다.
특히 그는 “내가 중 2때까지 이북에 살았는데, 교회 간다고 하니까 학교에서 매 맞았다”며 “교회든 절이든 종교 선택의 자유가 있어야 하는데, 광복 직후 이북에는 이런 자유가 없었다”고 술회했다. 이를 놓고, 그는 “진리가 없는 곳엔 자유가 없다”고 못 박았다.
나아가 그는 “평화는 진리이며, 억압은 진리가 아니”라며 “통일을 말할 때는 자유, 평등, 보편, 인권이라는 보편 가치가 중심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여 그는 “3·1운동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보편가치를 기독교가 먼저 제시하자”며 “해서, 비 기독교인들에게도 통용될 수 있는 언어로 통일 운동을 펼쳐 갈 것”을 당부했다.
이어 개회사로 기독교통일학회장 안인섭 총신대 교수는 “당시 기독교인은 3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2%에 불과했지만, 3·1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가령 그는 “기독교인 기소인원은 21.4%, 감옥에 잡혀간 사역자는 151명이 넘었다”고 밝히며 기독교 역할을 역설했다.
하여, 그는 “3·1운동 당시 전체 인구의 2%에 지나지 않던 기독교가 전체 3·1운동의 20% 이상을 추진했다”며 “그렇다면, 현재 인구의 19.7%에 달하는 기독교인들은 얼마나 평화 통일 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나아가 그는 “이번 모임이 3·1운동 정신을 계승해, 남북의 증오를 해결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끄는 논의가 되길 바란다”고 역설했다.
발제자들의 발표가 이어졌다. 성균관대 교육학과 권성아 초빙교수가 ‘3·1독립선언과 기독교 민족교육운동’을 발표했다. 그는 기독교 민족교육운동이 활발했지만, 그 만큼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3·1운동 이후 일제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 주도 하에, 1922년 2월 2차 조선교육령을 표방했다”며 일제의 민족 교육 탄압을 전했다. 이는 “일제가 조선에 대학을 허락하지 않은 정책”이라며 “1922년 평양 숭실학교, 이화학당의 인가를 취소하기 까지 이르렀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기독사학들은 일체 승복하지 않았다”며 “평양 숭실학교는 끝까지 반대했지만, 이들 졸업생들은 ‘별과생’이란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밝혔다.
또 그는 “3.1운동 핵심 인물이었던 이승훈, 조만식 선생은 조선민립대학 설립을 위해 1923년 총회까지 개최했지”만 “일제는 불온사상을 이유로 트집을 잡아 탄압했다”고 전했다. 아울러 그는 “일제는 황국신민을 길러내는 경성제국대학을 창설하기 까지 이르렀다”고 밝혔다. 이처럼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문화통치에 저항하려는 조선 기독 사학들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그는 정직히 밝혔다. 3·1운동 이후, 사이토 마코토의 문화통치에 이어 일본의 탄압은 멈추지 않고 가중됐다.
권 교수는 “1937에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2차 대전에 돌입하기 위해 신도(神道)사상을 강요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그는 “민족 정간지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변질됐음에도, 기독교는 끝까지 신도사상에 항거했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그는 “일제는 1938년 장로교계통 학교를 폐교시켰다”며 “기독교인 324명을 구속하고 처형하기 까지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아쉽게도, 그는 “이후 1938년 9월에 열린 제 27회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며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 국가행사로 규정했다”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1939년에 일제는 종교단체법을 제정하고, 1940년 기독교 ‘반전 공작 사건’을 조작해,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주기철 목사 및 조만식 장로 등을 체포해 고문했다”고 설명했다.
장로교의 신사참배 결의로 인한 영향일까? 타협할수록, 조선 기독교는 더욱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권 교수는 “조선 기독교는 결국 1942년 3월 ‘일본기독교 조선혁신교단’으로 개명했다”며 “더구나, 민족사상이 담겨있다는 이유로 모세 5경과 요한계시록이 삭제된 ‘일본어 성경’만 사용하도록 강요당했다”고 전했다.
이런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 기독교 민족 교육은 한계가 있었지만, 이 시대에 주는 시사점도 있다. 권 교수는 “구한말 기독교는 조선인들에게 희망이었다”며 “반상차별·남녀차별·적서차별에 갇혔던 우리 민족에게,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형상 따라 창조된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줬다”고 역설했다. 유일신 사상과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또 그는 “이런 기독교 정신은 3·1운동에 까지 이어져, 상해 임정 헌법에 ‘신인일치(神人一致)’를 명시하는데 영향을 줬다”고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신일일치 사상은 “대한민국이 국민의 평등과 자유를 추구하며, 나아가 인류의 문화적 평화에 공헌할 것”을 추구했다. 이는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의 토대가 된 것”이며, 나아가 권 교수는 “기독교 정신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역설했다. 이에, 그는 “신인일치 정신을 바탕으로 민족교육을 받은 소수 기독교 지도자 및, 기독 사학 오산학교와 숭실학교 출신들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합리화 한 대다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해방 이후, ‘반공주의’로 변질됐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그는 “‘반공주의’로 무장해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현재 ‘보수우파’의 대명사가 됐다”고 재차 주장했다. 때문에 그는 “‘반공만이 애국이고 진리’라는 생각이 자칫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으로 귀결되는 ‘하나님 나라’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곧바로 오일환 한양대 교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통합과정에서의 기독교 민족지도자들의 역할과 통합의 현재적 함의’를 발표했다. 그는 “3·1운동 이후 임시 정부는 조선의 한성 정부, 상해의 임시 정부, 그리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로 분립됐다”고 전했다.
이렇게 갈라진 임시정부 체제를 통합하기 위해, 나선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안창호였다. 오 교수는 “안창호는 ‘통일’이라 표현하며, ‘이는 해외 각 지역에 산재한 동포들을 한 개의 조직체로 단합시키자는 것’”을 역설했다”고 전했다. 하여 그는 “한성정부 대표 이승만, 대한국민의회 대표 이동휘, 상해 임정 대표 안창호는 ‘삼두정치(三蠹政治)’를 구성해 임시정부 통합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모두 기독교인 이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오 교수는 안창호와 이동휘의 ‘자기 희생’의 일화를 설명했다. 그는 “통합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알았던 기독교인들”이라며 먼저 안창호를 전했다. “안창호는 상해임시정부 통합에 주도적 역할로 인해 국무 총리직을 추천받았다”며 “하지만 직위보다 임시정부 통합이란 사명을 위해, 그는 내무총장직에서 내려가 국장급인 노동국 총판으로 옮겼다”고 오 교수는 말했다. 게다가 오 교수는 “안창호는 항상 이승만을 추어올리며, 임시정부 고위직을 차지하겠다는 욕심은 추호도 없었다”며 안창호의 자기 비움 정신을 강조했다.
“나는 내무총장으로 있는 것보다 한 평민이 되어 어떤 분이 총장이 되든 그 분을 섬겨서 우리의 통일을 위하여 힘쓰고 싶소. 그러므로 일전에 취임식을 하려다가도 주저를 하였소. 다른 것 다 잊어버리고 큰 것만 보고 나아갑시다”(주요한, 안도산전서 상:전기편, p202)
아울러 그는 “이동휘 선생은 이념적으론 좌익이자 무장 투쟁론자였다”며 “그러나 상해임정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대의를 위해 자신의 의견을 희생할 줄 알았다”고 전했다.
“우리 동지간의 의견충돌을 양보하는 이동휘는 될지언정 나의 의견을 극단으로까지 주장하여 대국을 파괴하는 이동휘가 되는 것은 일체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김방, ‘이동휘 연구’ p71)
한편, 오 교수는 “3·1운동은 남녀차별·반상차별·사농공상을 철폐한 대동단결의 결집체”라며 ‘국민 주권’을 온전히 담지 했던 3·1운동을 강조했다. 이어 그는 “3.1운동이 견지한 ‘국민 주권’은 임시 정부 헌장에 반영됐다”고 밝히며, “이런 임시정부의 ‘주권재민’ 원칙은 근대적 ‘민주공화제’ 정체성 수립에 초석을 닦았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 1조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 명시됐다. 아울러 그는 “이런 전통을 바탕으로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이 수립됐다”며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 정신을 계승 한다”는 제헌헌법 전문을 예로 들었다.
이에 그는 “식민지 시기 한민족 생존이란 역사적 맥락에서 3·1정신이 창출됐다”며 “이렇게 확보된 민족적 근대 독립국가 수립 의지는 대한민국 건설의 정당성을 확보시켰다”고 역설했다. 특히 그는 “북한은 인민공화국이라지만 실질적인 수령체제”라며 “보편적 가치를 잃은 체제”라고 꼬집었다. 하여 그는 “앞으로 통일 대한민국은 ‘국민 주권’을 견지하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신을 온전히 담지 해야 함”을 강조했다.
끝으로 김병욱 성균관대 초빙교수가 발제를 전했다. 그는 “3·1운동이 아닌 3·1혁명으로 명명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3·1혁명은 단순히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간 ‘운동’이 아니”라며 “그래서 저항민족주의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그는 “국사학자들은 3·1운동을 설명할 때, ‘민족주의’를 차용하지”만 “민족주의는 19세기 유럽이 근대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였다”고 밝혔다.
하여 그는 “3·1운동이 단순한 저항민족주의라면, 그 실패로 인해 왕정복고로 회귀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3·1운동은 부르조아-노동자 간 대립이 아닌, 다른 종교, 상이한 계급 간 공존을 꿈꿨다”며 “그런 점에서 미완의 혁명”이라고 역설했다.
나아가 그는 “현재 대한민국은 남남 갈등, 일자리, 생태계, 금융 화폐 문제 등 산적했다”며 “이는 사회 전반 지배-피지배 문제가 침전됐기 때문”이라 지적했다. 이는 “내 뜻과 생각대로 관철하는 행동 양식”이라고 그는 말했다. 때문에, 그는 “이런 관계에서 벗어나, 사랑과 우정, 신뢰 사회로 질적 전환을 이루는 게 중요함”을 역설했다. 이 지점에서, 그는 “3.1혁명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 건, 바로 노선의 대립보다 상생·협력·상호작용으로 생명력을 얻었다”며 “한반도 통일의 실마리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1부 세션이 끝나고 2부 세션에는 기독교북한선교회 이수봉 박사, 서강대 박종수 교수, 평택대 임상순 교수가 발표했다. 종합토론에는 정지웅 교수(ACTS), 강미랑 박사(총신대), 최규빈 박사(서울대)가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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