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3.1운동 100주년 기념 전국기독교학교대회가 영락교회에서 21일 오전 10시 반부터 개최됐다. 1부 학술대회, 2부 기독교학교대회로 나뉘어 진행된 이번 전국기독교학교대회는 3.1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했던 조선의 기독교 학교 등을 되짚어 보는 시간이었다.
1부 학술대회는 먼저 이덕주 감신대 명예교수가 발제는 했다. 그는 “당시 천주교 박해로 조선은 전반적으로 기독교 복음을 향해 의구심 섞인 눈초리로 바라보았다”며 “하여, 서양 개신교 선교사들은 병원 설립과 학교 설립을 통해 간접 선교를 시도했다”고 전했다.
가령, 그는 “알렌은 광혜원(후에 세브란스 병원), 언더우드는 경신학당, 스크랜턴은 시병원,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메리 스크랜턴은 이화학당을 설립함으로, 간접선교를 시작했다”며 “당시 조선은 선교를 금했지만, 교육과 의료 사역을 허락함으로 선교사들의 간접적 선교는 시작됐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죽어가는 환자들을 기꺼이 데려다가 무료 진료 하니까, 조선 사람들은 서양 선교사들을 향해 ‘저 사람들은 누구인가’를 생각했다”며 “선교사들은 기독교 기초 교리를 가르쳐, 마침내 개종자들이 나왔다”고 했다.
더불어 그는 “당시 영어를 배워서 출세하려는 근세 서구 학문에 대한 갈망이 조선 청년들 중에서 많았다”고 했다. 하여, 그는 “조선 청년들은 기독교 학교에서 서구 근대 학문을 배우면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며 “이렇게 개종자들의 집회가 빈번해지면서 1887년, 북 장로회, 미 감리회는 각각 지금의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했다”고 전했다. “의료와 교육 분야에서 ‘간접 선교’로 사역을 시작한 지 2년 만의 일”이라고 그는 힘주어 덧붙였다.
주목할 점으로, 이덕주 교수는 당시 서구 선교 교단들은 선교에 있어 중첩·경쟁을 지양(止揚)하기 위해, 시행했던 한반도 분할 정책을 설명했다. 그는 “1909년 북장로교, 남장로교, 캐나다장로회, 호주장로회, 미감리회, 남감리회 등이 선교를 경쟁적으로 하지 않기 위해, 대한민국을 각 지역을 분할해 할당받아 협력·선교를 지향했다”고 소개했다. 이른바 그는 “각각 주요 거점 도시 마다 미션(Mission) 스테이션을 설립했다”며 ”예로, 평양신학교의 설립이 대표적“이라고 전했다.
특히 그는 ”평양신학교 제 1회(1906) 졸업생으로 길선주, 한석진, 서경진 목사들은 서양 선교사들의 노력의 결과물“이라며, 곧바로 당시 졸업 사진을 보여줬다. 이어 그는 ”당시 길선주 목사 손에는 성경, 한석진 목사 손에는 태극기, 서경진 목사 손에는 우산이 들렸다“며 ”이게 상징하는 바는 바로 ‘애국, 기독교, 서구 근대 문물’“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그는 당시 평양신학교를 비롯해 대부분 기독교 학교들은 기독교 복음 정신인 ‘자유와 해방’을 적극 설파했음을 말했다. 일례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한석진 목사는 독립협회 관서 지부장을 지냈다”며 “개성 한영학교, 서울 경신학교 등 해외 선교부가 설립한 학교에는 항상 학생들이 나라사랑과 독립을 외쳤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그는 “105인 사건(1911) 때, 기독교 학교들의 교사와 학생들이 주역이 돼 옥고를 치렀다”며 “하여, 조선총독부는 105인 사건에 기독교 사립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대거 연류됐음을 파악해, ‘개정 사립학교규칙’을 제정해 탄압을 가했다”고 전했다.
이러한 개정 사립학교규칙이라는 조선 총독부의 탄압정책으로 항일정신이 기독교 학교 전반에 감돌게 된다. “이는 이후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다”고 그는 강조했다. 게다가 그는 “민족 대표 33인이 3.1운동 독립 선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학생, 보성전문학교 강기덕 학생들은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기독교 학교 학생들을 규합해 3.1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고 밝혔다. 그에 의하면, 3.1운동 전인 2월 28일에 숭동교회에서는 중·고등학생들이 모여 독립 운동 선언서 1,500매를 배포해 거사를 알렸고, 밤 9시 다시 정동제일교회에 모여 3.1운동을 준비했다.
아울러 그는 “익산 학교 교감이었던 문용기 집사는 3.1운동 때, 만세를 부르다가 순사에게 태극기를 든 오른팔이 잘렸다”며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드니까 순사가 또 이를 잘랐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그는 “문용기 집사는 두 다리로 곧추서 독립 만세를 외치니, 일본 순사는 또 다리를 잘랐다”며 “그 피가 묻은 의복이 현재 유산으로 남겨져 있다”고 밝혔다.
더불어 그는 “평북 강계는 산골 도시였지만, 기독교 계통 영실중학교 학생이었던 탁창국은 4월 8일 11시 강계읍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만세 시위를 외쳤다”며 “붙잡힌 탁장국은 매일 30대 씩, 4흘 간 맞아 결국 숨을 거두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탁창국은 미동병원에 실려 갔는데, 당시 북장로회 선교사는 이를 미국에 알렸다”며 “이후 세브란스 병원 내과 전문의였던 스코필드 선교사는 이를 파악해 미국에 문서로 보냈다”고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이 문서 이름은 “꺼지지 않는 불꽃”이며, 그는 “당시 선교사들이 기독학생들이 옥중에 있으면서 ‘꺼지지 않았던 불꽃’같았다”고 밝혔다.
이어 임희국 장신대 교회사 교수가 발제를 전했다. 그는 “1919년 3.1 독립만세시위 핵심 추진 세력은 학생들”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당시 1919년 예수교 장로회 총회 회록을 보니, 기독교 학교의 피해상황을 상세히 서술됐다”며 피해 상황을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평양의 3.1운동은 숭덕학교에서 시작됐다. 이어 그는 “숭실 전문학생들은 일본 경찰들의 추격을 받았다”며 “서양 선교사 모우리(E. M. Mowry)와 마포삼열(S. A. Moffett)은 학생들은 지하실에 숨겨줬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그는 당시 체포, 연행, 취조, 고문당했던 시위자의 증언을 선교사들이 기록한 내용을 전했다. 평양을 중심으로 말한 그는 “3월 3일 평양 거리에서 체포된 여성(21세)이 경찰서에 끌려가서 심문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에 의하면, 여성은 두 팔이 뒤로 잡아당겨져 결박당했고, 그 자세로 심하게 구타당했다. 그녀가 기절하면 그녀에게 찬물을 끼얹었고, ‘춥다’고 하면 일본 경찰은 담뱃불로 지졌고, 또 다른 경찰은 달궈진 쇳덩이로 그녀의 몸을 지졌다고 했다. 특히 그는 “수감자들 중에 기독교학교를 졸업했거나 재학 중인 사람들에게는 가혹하고 잔인한 형벌을 가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기독교학교가 3.1운동에 참여하고 주도한 원인을 분석했다. 그는 소안론(Swallen) 선교사의 증언을 토대로, “한 기독교학교 학생은 취조받으며, 독립운동은 우리가 받은 교육의 직접적인 결과이고, 선생님이 가르쳤던 수준에 이르려던 결과”였음을 밝혔다.
이에, 그는 “1897년 장로교회 전통으로 미국 장로교 북장로회 재한(在韓) 선교부 연례회의는 ‘교육정책’을 결의했다”며 “이는 학생들의 신앙 증진과 정신 함양에 힘써, 학생들로 하여금 직업인으로서 평신도 복음 전도자와 교회의 주류가 되도록 맞춰졌다”고 전했다. 일례로, 그는 “당시 1907년 전국 장로교회(785개)가 운영했던 소학교는 405개였다”며 “어림잡아 두 교회 당 소학교 하나를 설립했다”고 밝혔다.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그는 “당시 평양 숭실학교 설립자를 베어드 선교사로 흔히 알고 있지만, 실은 평안도 교회들이 십시일반으로 헌금을 모아 숭실 학교를 설립한 것”이라 전했다. 서양 선교사들의 교육 선교의 뜻을 당시 조선 교회들이 이어받고자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 기독교 학교는 대의민주주의 학습의 장(場)이었음을 전했다. 가령 그는 “당시 연동교회 중학교(경신중학교 전신)를 운영했던 선교사 게일은 유몽천자를 집필했다”며 “여기에 미국 보스톤 티 파티를 소개하며, 미국 독립을 소개했다”고 밝혔다. 보스톤 차(Tea) 사건은 당시 18세기 말 영국 의회가 미국에서 수입되는 차에 대한 과세를 부과하려 했다. 이에 당시 보스톤 시민들은 대의제 정치 원리에 따라, 대표를 선출해 과세에 저항했다. 그리고 3년 뒤 미국은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으며, 이는 미국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다.
이에 그는 “집필자 게일 선교사는 이를 설명하면서, 인류 박애정신, 민주시민의식, 애국정신, 대의를 위한 희생정신을 소개했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이런 대의민주정치 교육으로 말미암아, 연동교회도 1904년에 장로 선출에 있어 대의민주주의 선거를 활용했다”며 “이래로 교회는 대의민주주의 훈련의 도장”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는 “국가주권을 빼앗긴 나라에서 그 땅의 국민인 장로교회 교인들은 자유와 평등에 바탕을 둔 대의민주제도의 헌법을 바탕으로 교단 헌법을 세웠다”며 “이는 일제 국가권력에 예속되지 않는 자치와 자율을 보장받는 근거였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그는 “교회에서 실천하고 훈련한 대의민주주의는 제국주의 일본 제체와 정면으로 충돌했다”며 “이는 1919년 장로교회와 기독교학교가 민족 독립을 위한 3.1운동에 참여한 근거와 배경”이라고 역설했다.
곧바로 박상진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가 발제를 전했다. 그는 “3.1운동이 가능했던 건 기독교 학교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이어 그는 “1885년을 기점으로 북장로교, 남감리회 등 해외 선교부는 조선에 기독교 학교를 설립했다”며 “중요한 건 당시 교회는 ‘1교회 1학교’운동을 벌이며, 토착 조선 기독교에 의해 기독교 학교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활발했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당시 기독교학교는 건학 이념이 살아있었다”며 “철저히 기독교 건학이념에 의거해, 일제 총독부가 훼손하려는 기독교 교육과정을 방어하려 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교육학자 손인수 박사의 말을 빌려, “기독교 민족주의였다”고 표명했다. 이처럼 그는 “당시 기독교 학교는 개인적 신앙에 머무르는 않고, 애국·애족의 교육을 했다”며 “이는 기독교 학교를 설립한 목적이자 건학이념”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기독교 건학이념에 기반 한 교육은 3.1운동의 기폭제였다”고 덧붙였다.
게다가 그는 “당시 기독교 학교의 신앙 교육으로 신앙적 회심들이 철저한 뒤따랐다”며 “복음을 접한 아이들은 회심하고 신앙으로 거듭나니까, 예수를 따르는 제자 양육에 초점을 맞춘 교육은 결실을 거뒀다”고 했다. 나아가 그는 “당시 중요한 교과목은 성경”이라고 강조했다.
때문에 그는 “과감하게 3.1운동은 종교 운동”이라고 못 박으며, “정치적 독립운동으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더불어 그는 “3.1운동의 근본 동력은 기독교 정신에 따른다”며 “이는 성경을 제 1과목으로 했던 기독교 학교 교육에서 기인했다”고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 기독교 학교의 모든 교과목이 기독교 신앙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는 “신앙과 교육이 분리되지 않았다”며 “심지어 국어시간에는 성경을 지문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예로, 그는 “일제는 일본말을 교육시키려 했지만, 이화학당을 비롯한 당시 기독교 학교들은 국어과목을 사수했다”며 “왜냐면 민족의 혼이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다른 일례로, 그는 “공주 영명학교는 음악과목에서 찬송가 ‘그리스도의 군병가’를 가르치며 서양 음악을 소개했다”며 “이로서 항일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었다”고 전했다.
더불어 그는 “교육 시설은 열악했지만 당시 선생님이 곧 시설이었다”고 전했다. 가령, 그는 “한경직 목사의 진로를 놓고, 우용진 자작교회 전도사와 홍기두 진광 소학교 선생이 진지하게 논의했다”며 “이처럼 학생 교육을 놓고 교회와 학교가 함께 고민했었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한경직 목사는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조만식 선생을 회상하며 ‘그 분은 24시간 교육’이라 말했다”며 “24시간 교육은 ‘그분의 삶이 곧 교육’임을 말한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그는 “오산학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학교 선생들의 삶은 곧 교육 이었다”며 “그들의 헌신된 삶이 학생들 마음에 꿈과 소망을 준 것”이라고 역설했다.
한편 그는 현 공권력이 기독 사립학교의 교육권에 간섭하려는 상황을 암시하듯, 당시 조선 기독교 학교의 저항정신을 말했다. 그는 “당시 기독교 학교는 1915년 일제 사립학교령에 대해 저항했다”며 “이는 3.1운동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이를 놓고, 그는 “당시 기독교 학교는 기독교 건학 이념을 주창했다”며 “이처럼 기독교 사립학교는 학생 선발권, 교육과정 편성권, 교사 임용권, 등록금 책정권, 법인 운영 자율권을 보장 받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교육과정 편성권은 ‘사립학교는 기독교 건학 이념에 따라 교육과정을 만들 수 있다’이며, 교사 임용권은 ‘사립학교는 채용에 있어 신앙을 가진 사람을 기준으로 세울 수 있다’이고, 마지막으로 법인 운영 자율권이란 ‘건학이념에 따라 학교를 외부 공권력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 운영권’임”을 설명했다.
다만 그는 “헌법 재판소 판결문은 오늘 기독교 학교를 포함한 사립학교를 준공립학교라 했다”며 “이는 설립만 법인이지 국공립학교와 다를 바 없음을 뜻한다”고 지적했다. 이유로, 그는 “헌재는 국가 재정 지원 등 국가 통제 속에 기독교 학교가 있기 때문으로 봤다”고 덧붙였다.
하여, 그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기독교 학교의 독립성과 동일을 회복하기 위해 기독교 사립학교의 자율성 회복이 시급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독교 학교는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場)”이라며 “현재 기독교 사립학교는 복음도 무너지고, 사람도 변화되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나아가 그는 “조선의 기독교 학교들은 공공성을 강조했다”며 “안 믿는 사람들도 기독교 학교에 보낼 정도로 신뢰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당시 조선 사람들은 기독교 학교를 두고, 애국정신이 투철한 학교라 생각했다”고 이유를 소개했다. 반면 그는 “현재 교육의 전반은 개인의 입시, 진로에만 매몰된 교육을 한다”며 “그러나 당시 조선 기독교 학교 교육은 공적 이익을 위해 개인 출세를 희생할 수 있는 교육관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이었다.
끝으로 그는 “당시 예수교 장로회 노회는 주일학교 보고, 주중학교 보고 있었다”며 “이는 교회가 적극적으로 학교를 지원했던 것”이라 밝혔다. 특히 그는 “당시 장로교 안에는 학무국장이 따로 있었으며, 그 중 원두우(언더우드, 경신학교) 목사가 이를 맡기도 했다”며 “그러나 현재 한국 교회는 기독교 학교를 사명으로 끌어안는 데 퇴보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그는 “한국 교회는 적극적으로 기독교 학교 지원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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