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한교총 총무단은 '3.1운동과 기독교' 세미나를 25일 개최했다. 한교총은 이날 고신대 이상규 명예교수를 초청해 ‘3.1운동과 기독교’를 주제로 강연을 열었다. 그는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과 태화관, 전국 9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 선포를 기점으로 2개월, 광의적으로 1년여 간 국내와 만주, 연해주 등에서 확대된 민족적 항일독립운동”이라며 “전 인구의 10%에 해당되는 200만이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3월 1일에서 5월말까지 학살된 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피검자는 46,948명 이었다”고 밝혔다. 또 그는 “3.1운동은 한국인들이 신분, 직업, 계급, 지역 그리고 종교를 초월한 대동단결의 민족 운동이었다”며 “한국인이 근대민족으로 거듭나는 계기이자, 한민족의 주체적 독립 쟁취에 대한 자신감을 부여했으며, 나아가 독립운동의 지속적인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삼일운동은 그해 4월 11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져, 국민주권정부 수립운동이 일어났다”며 “거족적 민족 독립 운동의 구심점이 형성됐다”고 전했다. 아울러 그는 “삼일운동이 비폭력 운동으로 시작돼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을 교훈으로, 무장 독립운동을 촉발시킨 기폭제였다”며 “삼일운동에 참여했던 민중들의 정치의식이 고조돼, 국내 민족운동 기반이 강해졌다”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삼일 운동은 국산품애용, 근검, 절제운동, 계몽운동 등으로 발전했고, 나아가 세계 피 압박 약소 민족의 독립과 해방운동에 지극히 큰 영향을 끼쳤다”고 역설했다. 예로, 그는 “북경대학 중심의 5.4운동, 인도 간디 중심의 ‘샤타 그라하’비폭력 무저항운동이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기독교가 삼일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했음을 말했다. 그는 “기독교는 일제강점기 중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종교”라며 “조선총독부는 1910년 당시 기독교회가 20만 신도, 3백 개 이상의 학교, 3만이 넘는 학생, 1,900여개의 집회소, 외국인 선교사 270여명, 조선인 교직자 2천 3백여 명을 거느린 무시할 수 없는 집단 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기독교는 많은 병원과 자선기관을 운영하고 있었다”라며 “이는 기독교가 지니는 강력한 유대를 기반으로, 외국인 선교사들과의 협업을 통해 세계 여론과 연결돼 있어 일본은 기독교에 위협을 느꼈다”고 밝혔다. 때문에, 그는 “당시 조선 총독부는 한구기독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조선통치에 이용하든지, 한국기독교를 탄압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며 “조선총독부의 회유정책이 실패하자, 온갖 제재로 한국 기독교 분열에 박차를 가했다”고 전했다.
일례로, 그는 “종교 활동 규제를 위한 ‘포교 규칙(1915)’이 첫 째이고, 이후 기독교교육을 통제하기 위한 ‘사립학교 규칙(1911)’을 제정했다”고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안악사건이나 105인 사건을 통해 기독교를 탄압했다”며 “안창호를 중심으로 기독교계 인사들이 대다수인 신민회(新民會)도 105인 사건으로 해체됐다”고 강조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이상규 교수는 “그리스도인들의 심리적 저항이 삼일 만세 운동으로 표출된 것”이라며 “그리스도인들은 독립운동을 통해 신앙의 자유, 신교의 자유를 누리며 자유와 공의 등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다”고 역설했다.
때문에, 그는 “이상의 세 가지 이유가 어우러진 상호연쇄는 상당한 저항의 힘이었다”며 “또한 기독교계의 적극적 참여를 가져온 배경이 된다”고 전했다. 다만, 그는 “기독교의 지도적 인물 가운데 일부가 후일 훼절하고 친일의 길을 간 경우가 없지 않았다”며 “이점을 이유로 삼일운동에 기여한 한국교회의 역할마저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정당하다 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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