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너무 흘려서 너무 어지러워. 사채. 가게 결국은 말 안 통해"
20대 초반의 한국 여성 A씨가 지난해 봄에 일본 여성 단체에 보낸 휴대전화 구조요청 메시지다. 메시지를 받은 단체인 '폴라리스 프로젝트 재팬'(대표 후지와라 시호코)이 20일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메시지를 공개했다.
이 여성은 한국인 브로커에게 속아 대한해협을 건넜고 도쿄 우에노(上野)에서 '딜리버리 헬스'(출장 성매매)를 강요당했다. 성매매를 할수록 빚이 늘어났고, A씨가 사는 아파트에는 도주 방지용 감시 카메라까지 설치됐다. A씨가 구조를 요청했을 때에는 골반 복막염으로 피를 많이 흘린데다 아무것도 먹지 못해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어려울 만큼 쇠약해진 상태였다.
A씨가 이 지경이 되도록 일본 경찰에 신고하지 못한 건 일본 당국이 외국인 성매매 여성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포괄적인 인신매매대책법이 없고, 일본 정부는 법을 만들려고 하지도 않는다. 인신매매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쉼터를 만들거나 핫라인(신고전화)을 개설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만약 A씨가 일본 경찰에 전화했다면 관광 비자로 입국해서 돈을 벌었다는 이유로 강제 추방되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미국 국무부가 20일(현지시간) 발표한 연례 인신매매 실태(TIP) 보고서에서 한국을 1등급 국가로 분류하면서 일본을 '인신매매를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2등급 국가'에 포함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과 캄보디아, 인도 등이 2등급 국가다. 일본은 미국 국무부가 TIP를 처음 발표한 2003년부터 10년째 2등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주요 8개국(G8) 국가 중에서는 일본만 2등급이다. 2004년에는 한 단계 더 낮은 '2등급 감시대상국'으로 추락한 적도 있다.
여성 인권 후진국 일본에서 인신매매 피해를 가장 많이 보는 외국인 여성은 바로 한국인이다.
폴라리스 프로젝트 재팬이 2005년부터 여성 핫라인(☎일본 0120-879-871)으로 한 전화 상담 약 2천500건 중 30%는 한국 여성이 대상이었다. 외국인 중 비중이 가장 크다. 후지와라 대표는 "일본인 36%, 한국인 29%, 필리핀인 11%, 태국인 7% 순"이라고 소개했다.
상당수는 '일본 남자는 매너가 좋다. 술을 억지로 마실 필요도 없고 돈은 쉽게 벌 수 있다'는 등의 인터넷 허위 광고에 속아 일본행을 택한 경우다. 개중에는 일본 대학에 들어가려고 했다가 속아서 성매매 업소에 팔려가는 여성도 있다.
폴라리스 프로젝트 재팬과 상담한 20대 초반의 한국 여성 B씨도 한국에서 가정폭력 피해 여성을 돕는 사회복지사로 일하다 일본 유학을 감행했다. 학비를 벌려고 한국식 룸살롱에서 설거지와 청소를 하던 중 '마마'로부터 "가게가 망할 것 같으니 다른 곳을 소개해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새 가게에 가보니 소개비는 빚이 돼 있었고, A씨는 성매매를 강요당했다.
구체적인 사례를 공개한 폴라리스 프로젝트 재팬 관계자는 "한국은 수많은 자국 여성들이 일본에서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