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저처럼 아픈 사람들이 조건 없이 와서 치료받고 갈 수 있는 클리닉을 여는 꿈입니다. 아파봤기 때문에 그들을 더 잘 이해하고 보살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빨리 그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이름 이윤주, 그는 27세 청년이다. 생후 9개월에 선천적 심장병 수술, 17세에 죽을 고비를 넘기는 폐수술 후에 다시 신장 투석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윤주 씨지만 고비 때마다 찾아왔던 기적이 다시 오지 않으리란 법이 없기에 오늘도 힘을 낸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할 것도 많은 시기, 그는 일주일에 세번 꼬박 4시간 씩 투석기 옆에 앉아 4킬로그램의 물을 빼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하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도 메릴랜드 청년연합 모임인 매치스트라이크 음향 봉사만큼은 놓치지 않는 그다.
윤주 씨는 선천적 심장병으로 태어났다. 생후 9개월 때 첫 폐동맥 수술을, 돌이 지난 후 또 한번의 심장 수술을 받았고 후로는 조심하기는 했지만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했다. 미국으로 온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살기 좋은 미국으로 가자는 부모를 따라 온 워싱턴이다. 친구들도 많았고 공부도 잘했고 모든 것이 괜찮았다. 2002년 피를 토한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곧 죽을테니 수혈을 멈추라던 간호사 말에 기도했더니
어느날 부턴가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영주권도 없고 보험도 없는데 감당하지 못할 병원비 걱정이 앞섰다. 한달 동안이나 숨기다가 안되겠다 싶어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급히 응급실로 갔다. 병원에서는 천식이라고 했다. 왠일인지 약을 먹어도 진전이 없자 두 달 후 큰 병원에 다시 갔는데 무균실에 집어넣고 한 달 동안 테스트란 테스트는 다 해본 듯 싶다. 의사들이 그래도 원인을 알 수 없다며 일단 몸을 열어봐야겠다고 했다.
2시간이면 끝난다며 간단한 수술이라고 하더니, 48시간이 꼬박 걸리는 대수술이 됐다. 어릴 때 한 심장수술로 혈관 위치가 뒤틀려 있는데다, 폐 한 쪽을 몽땅 들어냈기 때문에 출혈을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윤주 씨가 수술실에 들어간 지 이틀째 되던 날 아침 어머니 유정화 씨(67)를 보호자실로 부른 의사는 ‘가망이 없다. 출혈이 그치지 않는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어머니 유정화 씨는 그 때 당시를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동일한 시간, 윤주 씨는 수술실에 있었다. 마취가 덜 깬 상태였지만 한 간호사가 하는 말이 똑똑히 들렸다. ‘더 이상 수혈하지 말아요. 장례식 때 더 안좋게 보이니까.’
간호사의 말을 들은 윤주 씨는 ‘아 이제 죽는거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내가 죽으면 어머니 아버지 고생 많이 안시키고 고통없이 죽게 해주세요. 그리고 만약 하나님 뜻이 있다면 살게 해 주세요’라고.
그때 윤주 씨는 하얀 불빛을 봤다고 했다. 멀리서 영어로 ‘예수님이 구원하신다(Jesus Save)’는 단어가 보이는 것 같더니 점점 그 단어가 커졌다. 그러다 갑자기 깜깜해졌고, 있는 힘껏 소리를 쳤다. ‘도와주세요(Help).’ 그때 마취 간호사가 다시 마취약을 투입했는지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이후 출혈이 가까스로 멈춰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3주 동안 무의식 상태였고, 의사들은 수술 충격이 너무 심해 기억을 잃었을 거라고 낙담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수술 중에 심장이 3번이나 멈췄기 때문에 2번은 전기충격기로, 1번은 인공호흡으로 회복했다. 다행히 AB형이라 모든 혈액을 수혈받을 수 있었지만, 병원 혈액은행에 있는 피를 모두 사용할 정도로 출혈은 심했다. 살아난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다행히 기억은 잃지 않았지만 수술 때 흘린 피로 신장 기능이 완전히 상실됐다.
2002년 대수술 후 윤주 씨는 매주 3번씩 4킬로그램의 수분을 빼내는 신장 투석기에 몸을 맡겼다. 저염분식에 하루 1리터 밖에는 수분을 섭취할 수 없어 먹는 것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몸도 쉽게 피로해지고 폐도 하나 밖에 없어서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찼다. 그러던 어느날 윤주 씨에게 다시 기적은 빛처럼 찾아왔다.
2007년 3월, 그날도 투석센터에서 투석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 병원 앞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차가 심하게 막히는 것을 봤다. 그리고 2시간 후 병원에서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신장이식 3번째 대기자였던 윤주씨에게 차례가 왔다는 것이다. 기증자는 바로 병원 옆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그 사람이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의사들은 빨리 이식된 신장인 만큼 그 기능이 20년 정도 유지될 것이라고 했다.
기적 같던 신장 이식, 교회 봉사에 빠져 살던 3년
이식 후 윤주 씨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워싱턴교회협의회 청년연합회 총무도 맡고, 메릴랜드 매치스트라이크 진행 및 음향을 돕는 등 신앙 생활에도 흠뻑 빠져들었다. 원래 봉사하는 일을 좋아했던 터라 청소년 연합 수련회 기획과 진행을 돕는 등 여러 활동을 이어가면서 간증도 여러차례 가졌다. 직장도 구했고, 온라인 대학 수업을 들으며 클리닉 운영의 꿈도 키워갔다.
그러나 행복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2010년, 이식했던 신장의 기능이 멈췄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져 너싱홈에 들어갔다.
하지만 윤주 씨에게는 든든한 지원군 어머니가 있다. 자궁암을 앓은 후, 40세에 낳은 늦둥이 윤주 씨,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심장병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태어난 그를 붙들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심장병과 죽을 고비를 넘긴 아들 병수발을 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지만 늘 “하나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며 입버릇처럼 되내이는 믿음의 사람이다. 원망해 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무슨 뜻이 있으시겠지’ 하고 금방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다.
그래도 현실은 아직 차갑다. 이식 후 3년 간 일해서 받는 800불 상당의 연금이 이들 생활비의 전부다. 설상가상으로 정부에서 나오는 연금 800불이 보험 최저 기준치에서 20불이 넘어 보험도 끊기고 이후 메디케어를 신청했지만 이식 비용의 20%는 윤주 씨가 부담해야 한다.
현재 7만불 정도의 수술비와 하루 3000불 꼴인 약값이 없어 1년째 대기자에 묶여 있는 상황. 일단은 최소 2만 5천불의 기금을 모으면 신장 이식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부모님은 나이가 많아 신장이식자로 적합하지 않고 누나는 제왕절개 수술을 했기때문에 이식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외 연고자는 없는 상태. 그를 위한 웹싸이트도 제작돼 있다. 매치스트라이크에서 알았던 동료들이 익명으로 조금씩 모아준 후원금도 고맙기만 하다. 이렇게 웹싸이트와 지역 일간지의 도움으로 약 2천불이 모였지만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도 윤주 씨는 희망을 잃지 않기로 했다. 심장병도, 죽기 직전의 폐수술도 이겨낸 그가 아닌가. 두 번이나 일어난 기적이 또 한번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기사를 읽고 많은 사람들이 성금과 응원을 보내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기자에게 윤주 씨가 말했다. “우선은 제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발견했으면 좋겠어요.” 그렇다. 그의 희망이야기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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