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미국은 최대 명절인 추수 감사절 기간이다. 추수 감사절을 맞아 문득 동양과 서양에서 감사를 드리는 방식은 어떻게 다를까? 그 차이가 있을까? 라는 질문이 생겼다.
아마도 그 차이를 동양과 서양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맹자와 플라톤에게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죽기 전에 신을 향해서 세 가지 감사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이와 비슷하게 맹자도 군자삼락, (君子三樂), 곧 군자의 세 가지 감사에 대해서 말했는데, 플라톤과 맹자의 감사의 방식을 비교해 봄으로서 감사에 대한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플라톤의 첫 번째 감사는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에 모든 짐승과 만물을 다스리는 영장임을 감사했다. 거기에 비해 맹자는 부모님이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함을 감사했다. 맹자는 같은 인간이되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생각하면서 가정을 함께 누리는 것을 감사했다.
두 번째로 플라톤은 야만인이 아니라 헬라인으로 태어나게 된 것을 감사했다. 헬라인은 철학도 있고, 사상도 있고, 요즘 말로 하면, 엘리트 계층이다. 거기에 비해서 맹자는 '하늘을 우러러, 또한 땅을 우러러 제가 한 점 부끄럼이 없으니 감사’ 한다고 말한다.
세 번째로 플라톤은 철학자로 태어나게 된 것을 감사했다. 거기에 비해서 맹자는 천하의 영재들을 불러모아서 한 집에서 교육을 하게 된 것을 감사한다. 이를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플라톤과 맹자를 통해 본 서양과 동양의 감사의 방식은 서로 다르다. 서양은 개인인 나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타자와의 구분을 통한 감사이다. 나와 자연과 이웃과 비교를 통한 감사다. 내가 짐승이 아닌 인간인 것, 많이 배운 지식인인 것, 그 중에서도 깊은 사고를 하는 철학자인 것을 감사한다. 반면에 동양은 자연 일체, 또는 공동체 중심이다. 부모와 형제 등 가족이 있다는 것, 하늘과 땅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사는 것, 제자들을 모아 가르칠 수 있는 것 다 공동체 중심이다.
동양과 서양의 감사 중에 어느 것의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다. 또 어느 쪽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도 아니다. 다만, 맹자를 따르든, 플라톤을 따르는 이런 감사는 반쪽 감사가 되기 쉽다. 플라톤처럼 비교와 구분을 통한 감사가 있다. 지금 죽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굶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면, 열등감이나 우월의식에 빠지기 쉽다. 돈이 없는 사람은 늘 부자를 보며 열등해지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보며 우월의식에 빠지기 쉽다. 나를 기준으로 하는 감사는 이기적인 성향을 띠기 쉽다.
그렇다면, 맹자의 감사는 어떨까? 나가 없는 공동체에 대한 감사 또한 반쪽 감사에 불과하다. 한국 정서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나는 불행해도 가족들만 좋으면 된다. 나는 불행해도 그 사람만 행복하면 된다. ‘나’의 전적 희생을 통한 감사 또한 반쪽 감사입니다. 이 때문에 개인의 희생을 담보로 회사와 국가에 대한 지나친 충성을 강요할 때가 종종 있다.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감사하면 될까? 진정한 감사는 나도 행복하고 내가 속한 공동체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 가정도 행복하고, 이웃도 행복한 것이 완전한 감사다. 나도 행복하고 교회도 행복한 것이 진정한 감사다. 나도 행복하고 국가도 행복한 것이 진정한 감사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도 기쁘고 나도 기쁜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진정한 감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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