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이수민 기자] 한신대학교 신학연구소(소장 김재성)가 울리히 덴 교수(독일 함부르크대학교 상호문화신학/종교학)를 초청,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운동”을 주제로 ‘해외석학초청 학술강연’을 개최했다.
21일 오전 한신대 신대원 서울캠퍼스 채플실에서 열린 행사에서 울리히 덴 교수는 "본회퍼가 아무리 늦어도 1930년대 이래 점점 득세하는 나치즘이라는 조건 하에서 그리고 평화적 정치의 관점 속에서, 대체적으로 자신의 교회론적 사고와는 독립적으로 정치적 행위와 관련하여 에큐메니칼 활동을 했다"면서 "자신의 정치적 관여의 결과로 그는 결국 교회에 대한 사유를 외향화 했고 암암리에 정치적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울리히 덴 교수는 "본회퍼의 자서전을 보면 매우 이른 시절부터 그가 국제적으로 활발히 활동하였기에 에큐메니칼 교제를 맺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1930~1년 유니온 신학교 수학 시절 뉴욕에서 머물던 때 할렘(Harlem) 지역의 흑인 교회들과의 경험을 통해 깊은 감명을 받기도 했던 사실과 세계교회협의회 전신 세계교회친선연맹(WFK) 청년부 총무, 런던 2곳의 독일교회 목회 등을 설명하면서 "본회퍼가 다양한 국제적인 경험을 하게 된 것은 한편으로는 그의 앎에 대한 열망과 고민도 있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의 정치적 참여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덴 교수는 "본회퍼에게 할렘의 아비시니안 침례교의 흑인 교회에서의 경험은 하나의 중요한 분기임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본회퍼는 인종분리정책에 대해 분노했는데, 미국 아비시니안 침례교회 교인들의 예배를 통해 그는 “이 나라에서는 오직 억압받는 흑인들에게서만 올바른 종교가 있을 수 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미국 동창 마일스 호튼은 본회퍼가 처음으로 흑인교회의 예배를 방문한 후에 그와 나눈 대화에서 “오늘 아침 할렘에서 그가 미국에서 진정한 종교를 경험한 유일한 순간이다“라고 언급했다고 전했다.
이후 본회퍼는 유니온신학교 시절 열려진 사회적 복음에 대한 입장과 더불어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더 적극적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에 관여하게 된다. 덴 교수는 본회퍼가 "박사학위 논문과 교수자격논문에서 엄격하고도 신학적 철학적으로 매우 박식한 신학적 작업을 한 후에도, 신학적이고 사회적인 방식의 새로운 시작에 열린 모습을 보여주고, 칼 바르트와도 거리를 두며, 사회윤리적으로 참여적인 에큐메니칼 네트워크 양쪽에 적극적으로, 세계적인 오이쿠메네의 평화적 입장에 참여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덴 교수는 "본회퍼가 나치 치하라는 조건 하에서 교회정치적이고 정치적인 필요를 위해서만 에큐메니칼 조직을 이용하고자 했다는 추측은 그의 1935년의 글("고백교회와 오이쿠메네")을 통해 상대화, 즉 약화된다"고 말하고, 본회퍼에게 있어서 "오이쿠메네의 신학적 관심을 알고, 높이 평가하고, 고백교회가 이러한 관심사의 한 부분이 되기를 바랬다"고 이야기 했다. 더불어 본회퍼는 긴박한 주제와 관련해 고백교회를 신학적으로 정립하고, 에큐메니칼적으로 공인되도록 이끌었다고 한다.
때문에 덴 교수는 "이러한 의미에서 본회퍼가 오이쿠메네를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의 특별한 관심을 향하여 나아간 확실한 에큐메니칼 운동가였음이 틀림없다"고 했다. 다만 그는 "본회퍼가 정치적으로 안정된 전후 시기, 세계교회협의회가 설립될 수 있었던 1948년에도 이러한 관심사를 이어갈 수 있었을지, 아니면 그가 옥중에 발전시킨 새로 거듭난 교회에 대한 표상이 실현되지 않은 것을 여기에서 보았기에 프리드리히 지그문트-슐체(Friedrich Siegmund-Schultze)처럼 제도화된 오에쿠메네에 등을 돌렸을지, 이에 대해서 우리는 단지 추측할 수 밖에 없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한편 한신대 학술원 신학연구소 측은 "올해 2015년은 디트리히 본회퍼(1906.2.4~1945.4.9)의 서거 70주년"이라 밝히고, "본회퍼의 순교적 삶과 실천적 신학 등 믿음의 유산을 헤아리고 한국교회와 신학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행사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통역에는 김태연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원 상호문화신학/종교학)가 수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