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기독일보 김장섭 전문위원] 어느날 LA국제공항에서 찌그러진 압력밥솥을 가슴에 안고 기대에 들뜬 얼굴로 비행기를 기다리는, 60대 초반의 안경 낀 사내를 우연히 만난다면 당신은 그를 본 것이다. 험한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사랑 갚을 길 없어, 치과기구 소독에 안성맞춤인 밥솥과 더불어 1년에 한 달 이상을 자비로 선교현장에서 살며 시간의 십일조를 지키는 LA 한인타운 치과의사 김범수 집사.
모태신자로 무덤덤한 신앙생활 하다
40세에 뜨겁게 주님 만나 선교 헌신
아프리카 중남미 중국 북한 등 방문
사랑의 인술로 주민들에게 예수 전해
내년에도 파푸아뉴기니 등 찾을 계획
그는 아프리카, 러시아, 중국, 북한, 멕시코, 중남미, 파푸아뉴기니 등 땅의 끝끝 같은 문명의 사각지대를 누비며 행복한 전도자의 삶을 살아왔다. 얼마전부터는 동양선교교회 선교부 책임까지 맡아 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올해만도 모로코, 몽골, 러시아 등을 방문하고 20년째 드나드는 멕시코 교도소에도 5차례나 갔다. 9월에는 페루 선교가 그를 기다린다.
내년에는 케냐와 말라위, 꼬박 48시간을 가야 하는 파푸아뉴기니 등을 찾는 굵직굵직한 일정이 잡혀 있다.
“많은 나라에서 치과치료를 합니다. ‘당신이 우리 마을에 처음 온 의사’라는 말을 들은 곳도 있어요. 선교지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무슨 큰 도움이 된다기보다 그저 선교사님의 사역에 잠시의 치과혜택을 보태는 정도지요. 문명과 담 쌓은 나라를 많이 가다 보니 온종일 서서 아이들의 이빨을 300개 뺐던 적도 있습니다. 하루 40~50개 빼는 게 보통인데. 한 번은 케냐에서 아이들에게 항생제를 주면서 하루 3번 식후에 복용하라고 하는데 선교사님이 옆구리를 찌르며 말씀하시는 거예요. ‘얘들, 하루 한 끼 먹어’. 다 찢어진 옷을 입은 맨발의 아이들이었지만, 얼굴 표정만은 저보다 행복해 보였어요.”
“이빨쟁이인 내가 잘 하는 일로 섬길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쁘다”는 그는 지상명령에 순종해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지만 결코 자기의 섬김을 자랑하지 않는다. 비록 불편한 식사와 잠자리, 교통 등 척박한 환경을 겪는다 해도 자신은 잠깐 방문했다가 풍요로운 미국 땅으로 다시 돌아오는 사람임을 잊지 않는 까닭이다.
“겨울에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블라디보스톡 인근에서 고려인들과 러시아인들을 20년간 섬겨온 은행원 출신의 선교사,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에 척박한 나라에서 선교하는 후배 치과의사, 연변과기대에서 컴퓨터를 가르치며 4년간 ‘실버 미션’을 실천 중인 72세 장로님, 아이비리그를 나와 유엔에서 근무한 경력자임에도 개발도상국에서 월 300달러를 받으면서 10년째 노하우를 나눠주는 5개 국어가 능통한 한인 젊은이, 한국말을 할 상대가 없어 우리가 가기만 해도 위로가 된다는 선교사, 이런 분들을 보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처음부터 그가 선교에 타는 목마름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부모가 물려준 모태신앙을 강퍅한 ‘못해! 신앙’으로 삼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신나게 놀다가 주일이면 성경책 들고 교회 뜰만 밟는 생활을 오래 했다. 그러던 중 불혹의 나이에 그리스도를 뜨겁게 만났다.
“약 20년 전 빅베어에서 열린 뜨레스 디아스에 갔다가 회복을 경험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끌려가 진행되는 순서에 무덤덤하게 참여하고 있었는데 봉사자로 온 이들은 기쁨에 겨워 섬기고 좋아서 손뼉을 치며 찬양하는 등 난리가 난 거에요. 저는 하나도 안 기쁜데 말이죠. 그러다 불을 꺼 행사장이 캄캄해졌는데 누군가가 대야를 들고 다가와 제 더러운 발을 씻기기 시작하는 것이었어요. 그 순간, 갑자기 눈물샘이 터져 펑펑 울었습니다.”
김 집사는 “마치 예수님께서 친히 나의 발을 씻기시는 느낌이었다. 메말라 있던 제가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그토록 많이 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말로 당시를 회상했다.
예배가 삶이 되고 삶이 예배가 되기를 소망하는 김 집사는 선교지에 나가지 않는 평소에는 LA 한인타운 올림픽과 알링턴 코너에 자리잡은 ‘김범수 치과’에서 온화한 미소와 말랑말랑한 목소리로 환자들을 보살핀다.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새벽이면 오늘의 은혜로 오늘을 살기 위해 제단에 나아가 무릎 꿇는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재림의 날까지 선교의 길을 가다가 그길 끝에서 다시 오시는 영광의 주님을 맞게 해 달라는 것이 그의 간절한 기도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작은 일상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 생명의 환희’가 전해지고, 그 환희가 선교 열망을 싹 틔워 열매 맺게 되기를 주님께 청한다.
그는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품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교도소 사역에 마음을 쏟고 있는 김재경 전도사와 돕는 배필의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다.
대학생 딸과 아들(앨리슨, 아이잭)을 두고 있는 가운데 비행기 조종의 꿈을 가진 아들이 오지로 복음 전하러 가는 사람들을 경비행기로 실어 나르는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기를 그는 은근히 바라며 기도하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폐렴을 앓으면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살아난 아들은 그에게 또 하나의 ‘은혜의 표지’다.
추수하는 날의 얼음냉수 같이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자가 되기 위해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김 집사는 그동안의 선교여행 에피소드 등을 모아 ‘치과가 간다’ ‘예수님 치과’ ‘사랑은 동사다’ ‘사랑한다, 날마다’ 등의 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