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날 때부터 태열을 앓았다. 고름덩어리가 되어 3살 때까지 곧은 자세로 누워만 지내던 나를 보며 마을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의사들 조차 ‘살 가망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목사의 딸로 신앙을 가졌던 어머니는, “이 아이를 살려만 주시면 주의 종으로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기도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다.”
원로목회자 인터뷰, 세번째 주인공 박석규 목사의 이야기다.
어린시절 어머니의 기도로 죽을 고비를 넘긴 박 목사는 “내가 간증할 것은 어머니의 기도와 죄와 허물로 죽을수 밖에 없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감격 밖에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 어머니의 기도, 그 무한한 힘
“망나니로 방황하던 자식을 어머니가 눈물로 기도해 제가 목사가 됐습니다.” 어린 시절 죽을 아들을 살려낸 어머니의 끈질긴 기도와 권유로 방황하던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1958년 감리교 신학대학에 입학하기에 이르렀다.
평생 박 목사의 든든한 기도 지원군이 되어줬던 어머니는 작년, 98세의 나이로 주님 곁으로 가셨다.
# 회개, 능력을 받다
신학교 입학 후 시간은 흐르고, 주의 종으로 거듭난 것은 시골교회 전도사로 사역할 때다. “논산 영암 기도원에서 기도하다가 눈물로 회개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동안의 잘못된 삶과 불순종의 모든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그는 통곡하며 회개했다. 신학교에서는 지식으로만 다가왔던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비로소 가슴으로 다가왔다.
그 후 능력을 받은 박 목사는 영안이 열리고, 신유의 은사를 받아 기도하면 병자가 일어나는 역사가 있었다. 그래서 감리교 목사임에도 주로 초교파적으로 다양한 교회의 부흥회 강사로 초청돼 전국을 누볐다.
# ‘선교, 누구를 보내려느냐’- 남미선교 4년
한국 기독교 100주년을 맞아 그동안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변화하는 교계의 움직임이 활발해질 무렵인 1977년, 박 목사도 선교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4년 군목을 마치고, 대위로 제대한 후 인천 부평에서 목회를 하던 박 목사는 직접 가는 선교가 아닌 보내는 선교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새벽마다 ‘네가 가야지, 누구를 보내려느냐’는 음성이 마음을 울렸습니다.” 선교사로부터 4년 장학금을 받고 신학을 공부하였던 박 목사는 자꾸 가슴을 치는 음성을 거절하지 못하고, 안정된 교회를 뒤로 하고 선교지로 떠났다. 아내와 자식들을 남겨둔 채 홀홀단신 ‘병아리 감별사’ 여권 하나를 가지고 내딛은 이국땅, 파라과이였다. 남미 한인 선교사라는 거창한 타이틀과는 달리 파라과이에서의 그의 삶은 고됐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없고, 목사라고 대접해 주는 이들도 없고, 가족들은 떨어져 있어 고독하고 외로웠으나 당시 저의 영성이 굉장히 맑아졌습니다.” 파라과이에서의 1년 8개월, 선교할 여건이 되지 않는 척박한 땅에서 그는 닭공장에서 일하며 주변 한인들을 위로하는 목회를 했다. 농업이민으로 돈벌러 온 사람들, 원주민들이 영주권을 뺏어 집에 돌아갈 수도 없는 사람들, 어려운 생활에 마음이 가난해진 그들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여전히 선교하기에는 척박한 땅이었다.
파라과이의 바로 옆 나라 ‘아르헨티나’에는 이미 한인교회가 있었다. 파라과이에서는 당장 한인교회를 세우기 어려운 상황. 아르헨티나 교회에서 그를 초청했다. 가족과의 상봉도 그 때 이뤄졌다. 한국과 국교를 맺고 있던 아르헨티나에서는 가족 초청이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아르헨티나에는 5.16혁명에 반대하던 한인들이 많이 망명오던 때였다. 박 목사는 토요일 마다 청년 집회를 열었고, 깡패가 회개하는 역사들도 많이 일어났다. 그 중에 한 명은 보석같이 애지중지하는 마도로스 파이프 7개를 그 자리에서 다 꺾어버리고 목사가 된 이도 있다.
# “더 작은 교회 찾아간” 이민 목회 30년
남미선교 4년. 자녀 교육을 위해 미국행을 결심하고 1980년 워싱턴으로 왔다. 당시, 지금은 워싱톤감리교회로 통합된 포토맥연합감리교회를 담임하며, 30여 교인을 200여명으로 성장시켰다. 박 목사는 목회 뿐 아니라 워싱턴교역자회 회장과 제 12대 워싱턴한인교회협의회 회장을 역임하며 교계 연합 활동을 위해서도 활약했다. 또 캐나다와 미주 전역을 누비며 부흥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80년에 와서 90년, 딱 10년 만에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목회지를 이동했다. 목회를 시작할 때 10년만 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모두 가지 말라며 붙잡았고 뉴욕 교회로 갔을때 버스를 대절해 따라오기도 할만큼 교인들과의 정은 깊었다. 뉴욕 교회의 사정을 본 교인들은 더욱 완강히 박 목사를 말렸다.
그러나 그는 완고했다. “더 어려운 교회로 가는 것이 맞다”는 그의 목회 신조대로 애써 옛정을 뿌리쳤다. 규모나 시설면에서 훨씬 어려운 교회였지만 박 목사는 “지나보면 겉으로는 실패처럼 보여도, 늘 어려운 교회로 갔던 것이 자랑거리가 된다”고 했다.
뉴욕 목회 14년, 뉴저지 목회 5년을 했던 박 목사는 “이민 목회 30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며 “은퇴 전에 좀 더 충성할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또 그는 “큰 교회들이 해외 선교도 좋지만 작은 교회를 도와야 한다”며 “자녀들 학비가 없어 어려워하는 지역 교회가 많으니 다른 선교도 좋지만 작은 교회들도 많이 도왔으면”하는 바람도 전했다.
인생의 끝자락에 있는 박 목사의 기도제목은 “성결하고 거룩하게 생을 마치는 것” 그리고 “이 땅 교회들이 더 순수하고 정결해졌으면 하는 것”이다.
박석규 목사는 80년에서 90년까지 워싱턴에서 목회할 당시 한국일보에 기고했던 글을 모아 ‘영원한 오늘(쿰란 출판사)’이라는 시와 종교 수상집을 출판하기도 했으며, 현재도 한국일보에 ‘시, 삶과 생각, 삶의 향기’ 등을 지속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박석규 목사. | |
어린시절 어머니의 기도로 죽을 고비를 넘긴 박 목사는 “내가 간증할 것은 어머니의 기도와 죄와 허물로 죽을수 밖에 없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감격 밖에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 어머니의 기도, 그 무한한 힘
“망나니로 방황하던 자식을 어머니가 눈물로 기도해 제가 목사가 됐습니다.” 어린 시절 죽을 아들을 살려낸 어머니의 끈질긴 기도와 권유로 방황하던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1958년 감리교 신학대학에 입학하기에 이르렀다.
평생 박 목사의 든든한 기도 지원군이 되어줬던 어머니는 작년, 98세의 나이로 주님 곁으로 가셨다.
# 회개, 능력을 받다
신학교 입학 후 시간은 흐르고, 주의 종으로 거듭난 것은 시골교회 전도사로 사역할 때다. “논산 영암 기도원에서 기도하다가 눈물로 회개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동안의 잘못된 삶과 불순종의 모든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그는 통곡하며 회개했다. 신학교에서는 지식으로만 다가왔던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비로소 가슴으로 다가왔다.
그 후 능력을 받은 박 목사는 영안이 열리고, 신유의 은사를 받아 기도하면 병자가 일어나는 역사가 있었다. 그래서 감리교 목사임에도 주로 초교파적으로 다양한 교회의 부흥회 강사로 초청돼 전국을 누볐다.
# ‘선교, 누구를 보내려느냐’- 남미선교 4년
한국 기독교 100주년을 맞아 그동안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변화하는 교계의 움직임이 활발해질 무렵인 1977년, 박 목사도 선교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4년 군목을 마치고, 대위로 제대한 후 인천 부평에서 목회를 하던 박 목사는 직접 가는 선교가 아닌 보내는 선교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새벽마다 ‘네가 가야지, 누구를 보내려느냐’는 음성이 마음을 울렸습니다.” 선교사로부터 4년 장학금을 받고 신학을 공부하였던 박 목사는 자꾸 가슴을 치는 음성을 거절하지 못하고, 안정된 교회를 뒤로 하고 선교지로 떠났다. 아내와 자식들을 남겨둔 채 홀홀단신 ‘병아리 감별사’ 여권 하나를 가지고 내딛은 이국땅, 파라과이였다. 남미 한인 선교사라는 거창한 타이틀과는 달리 파라과이에서의 그의 삶은 고됐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없고, 목사라고 대접해 주는 이들도 없고, 가족들은 떨어져 있어 고독하고 외로웠으나 당시 저의 영성이 굉장히 맑아졌습니다.” 파라과이에서의 1년 8개월, 선교할 여건이 되지 않는 척박한 땅에서 그는 닭공장에서 일하며 주변 한인들을 위로하는 목회를 했다. 농업이민으로 돈벌러 온 사람들, 원주민들이 영주권을 뺏어 집에 돌아갈 수도 없는 사람들, 어려운 생활에 마음이 가난해진 그들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여전히 선교하기에는 척박한 땅이었다.
파라과이의 바로 옆 나라 ‘아르헨티나’에는 이미 한인교회가 있었다. 파라과이에서는 당장 한인교회를 세우기 어려운 상황. 아르헨티나 교회에서 그를 초청했다. 가족과의 상봉도 그 때 이뤄졌다. 한국과 국교를 맺고 있던 아르헨티나에서는 가족 초청이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아르헨티나에는 5.16혁명에 반대하던 한인들이 많이 망명오던 때였다. 박 목사는 토요일 마다 청년 집회를 열었고, 깡패가 회개하는 역사들도 많이 일어났다. 그 중에 한 명은 보석같이 애지중지하는 마도로스 파이프 7개를 그 자리에서 다 꺾어버리고 목사가 된 이도 있다.
# “더 작은 교회 찾아간” 이민 목회 30년
남미선교 4년. 자녀 교육을 위해 미국행을 결심하고 1980년 워싱턴으로 왔다. 당시, 지금은 워싱톤감리교회로 통합된 포토맥연합감리교회를 담임하며, 30여 교인을 200여명으로 성장시켰다. 박 목사는 목회 뿐 아니라 워싱턴교역자회 회장과 제 12대 워싱턴한인교회협의회 회장을 역임하며 교계 연합 활동을 위해서도 활약했다. 또 캐나다와 미주 전역을 누비며 부흥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80년에 와서 90년, 딱 10년 만에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목회지를 이동했다. 목회를 시작할 때 10년만 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모두 가지 말라며 붙잡았고 뉴욕 교회로 갔을때 버스를 대절해 따라오기도 할만큼 교인들과의 정은 깊었다. 뉴욕 교회의 사정을 본 교인들은 더욱 완강히 박 목사를 말렸다.
그러나 그는 완고했다. “더 어려운 교회로 가는 것이 맞다”는 그의 목회 신조대로 애써 옛정을 뿌리쳤다. 규모나 시설면에서 훨씬 어려운 교회였지만 박 목사는 “지나보면 겉으로는 실패처럼 보여도, 늘 어려운 교회로 갔던 것이 자랑거리가 된다”고 했다.
뉴욕 목회 14년, 뉴저지 목회 5년을 했던 박 목사는 “이민 목회 30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며 “은퇴 전에 좀 더 충성할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또 그는 “큰 교회들이 해외 선교도 좋지만 작은 교회를 도와야 한다”며 “자녀들 학비가 없어 어려워하는 지역 교회가 많으니 다른 선교도 좋지만 작은 교회들도 많이 도왔으면”하는 바람도 전했다.
인생의 끝자락에 있는 박 목사의 기도제목은 “성결하고 거룩하게 생을 마치는 것” 그리고 “이 땅 교회들이 더 순수하고 정결해졌으면 하는 것”이다.
박석규 목사는 80년에서 90년까지 워싱턴에서 목회할 당시 한국일보에 기고했던 글을 모아 ‘영원한 오늘(쿰란 출판사)’이라는 시와 종교 수상집을 출판하기도 했으며, 현재도 한국일보에 ‘시, 삶과 생각, 삶의 향기’ 등을 지속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박석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