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기독일보] 조지아 주 둘루스 한인타운에서 약 1시간 30분 남쪽에 위치한 라그랜지 소재 어드밴트루터란교회(Advent Lutheran Church)에서 사역하고 있는 박민찬 목사에게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특별하다. 평생의 동반자인 권미연 사모와 결혼한지 25년, 미국 루터교 사역 20년 그리고 미국인 목회 5년이 되는 2015년이기 때문이다. 지난 7월 5일 미국교회 담임사역 5년을 맞아 온 성도들의 축하 속에서 감사예배를 드린 박민찬 목사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1990년 도미해 필라델피아 저먼타운에 위치한 루터란신학대학원에서 석사과정 공부를 시작하면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박민찬 목사는 종교학 석사 과정(MAR)을 졸업하고 곧바로 기독교 교육학 박사 과정(STM) 코스워크를 밟게 됐다. 141년 만에 루터란신대원에서 동양인 최초의 졸업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ELCA(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America, 복음주의루터교회)의 노(老) 감독(Bishop)은 박 목사의 손을 꼭 붙들고 3시간 동안 깊은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루터교단에서 한인 목회를 해줄 수 있냐는 제안을 한다.
"생각지도 못한 요청이었기 때문에 2개월의 기도시간을 달라고 부탁하고 가족들과 충분히 상의했어요. 원래 계획은 학위 과정을 마치면 한국으로 돌아가 담임 목회를 하는 것이었는데, 생소한 루터교단의 목회자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죠. 더군다나 말도 다 통하지 않는 미국에서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를 생소하고 한국 목회자도 전혀 없는 미국 교단에 뛰어 들어 선구자 정신으로 루터교단 목회자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목회가 20년입니다"라고 운을 뗀 박 목사는 "서른 두 살에 개척교회 목회자로 단독목회를 시작한 이후 20년 내내 한 주일도 쉬지 않게 하시고 부족한 종을 하나님의 사역자와 청지기로 사용해 주심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 그리고 인도하심이 강하게 역사하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라고 소회를 나눴다.
1994년 연말 뉴욕 플러싱에 위치한 미국 루터교회 동사목사로 부름 받아 100% 백인들로 구성된 메시야루터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고, 미국인 교회 목회를 배우는 동시에 한인들에게 영혼구원을 위한 전도를 시작한 그는 2001년 1월까지 약 6년 동안 동사목사와 한인교회 담임목회를 감당했다. 같은 기간 미국인 성도가 80여명에서 30여명으로 감소세를 면치 못했지만, 한인목회는 박민찬 목사 가족을 시작으로 80명 이상으로 교세가 성장하는 하나님의 일을 체험하게 됐다.
뉴욕에서의 한인 선교가 어느 정도 이루어 졌다고 판단한 교단본부는 제 2의 한인 선교를 계획하고 박민찬 목사를 애틀랜타로 파송한 것이 2001년 봄이다. 알파레타에 위치한 백인 중심의 프린스오브피스루터란교회에서 같은 형식으로 동사목사와 한인교회 담임목사로 사역을 시작해 한인 가정이 다섯 가정으로 늘어난 1년 뒤, 크라이스트킹루터란교회로 장소를 옮겨 사역을 이어가게 됐다.
'메시야한미연합루터교회=무료영어강좌'라는 인식이 생길 정도로 9년 동안 3천명 이상의 한인들이 거쳐가는 명실공히 대표적인 한인타운 무료영어강좌를 개설해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쉴새 없이 발 품을 팔아 알리고 백인 성도들을 설득해 흔쾌히 강사로 나서게 하는 등 열심으로 섬긴 박민찬 목사와 한인 성도들의 역할이 컸다. 당시 영어강좌는 경쟁률이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이와 동시에 무료 한국어 학교, 무료 컴퓨터 강좌, 무료 실버대학 그리고 무료 시민권 강좌까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한인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 물론 이를 통해 루터교단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 재고와 전도효과도 적지 않았다.
박민찬 목사는 한인목회가 여러 어려움 가운데서도 자리잡아 가던 2010년 봄에 제 2의 한인 목회를 타주 혹은 다른 지역에 하나 더 개척하겠다는 의지를 교단에 피력했고 알라바마, 미시시피, 테네시 주를 타진하던 중 뜻하지 않게 라그랜지로 향했다. 당시 인근에 한국 자동차 공장 설립으로 한인들이 모여들던 때였기 때문에 하나 둘 한인교회가 생기고 있었고, 당연히 한인 목회를 위한 발걸음이라고 생각했던 주변의 생각과 달리 그는 라그랜지의 유일한 루터교회, 그것도 100% 백인들로만 구성된 현재의 어드밴트루터란교회 담임으로 청빙 받아 '백인 목회'를 하게 된다.
15년 이상 한인 목회만 하던 그가 왜 후반부에 다시 백인 목회로 돌아서게 됐을까? 5년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박민찬 목사가 25년 전 미국 교단에 들어가 한인 목회를 시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또 다른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교회의 모습이 현재 미국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33년 역사를 갖고 자체 성전을 보유한 안정된 교회지만 20~30명의 나이 지긋한 백인 교우들이 모여 성장에 대한 관심이 없던 상황이었죠. 성장 없이 기존 성도들로만 유지되다 보니 하나 둘 천국으로 가는 성도들이 늘수록 자연스럽게 교세가 감소하고 있었습니다. 저 말고도 백인 목사님 3명이 후보였는데 절 택한 것은 그들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분명이 있으셨어요. 미국인도 아니고 언어도 완벽하지 못한 한인 1세인 저를 담임으로 택한 성도들과 부딪힘이 없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단에 엎드려 기도하며 지혜를 구했습니다. 현재 한인들을 비롯해 다양한 인종이 모이는 교회로 70-80명이 모이는데, 교회 분위기는 물론 기존에 변화를 꺼려하던 백인 성도들 역시 마음을 열고 선교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앞으로의 계획과 비전을 물었다.
ELCA를 포함해 미국 주요교단의 동성애 수용 문제, 너무나 자유롭게 이혼하는 모습들, 자녀들에게 기독교 교육을 전혀 간섭하지 않는 점 등 여러 가지 반기독교적인 요소가 숙제로 남아있다고 솔직하게 고백한 박민찬 목사는 그러나 교단적인 부분에서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고 소돔과 고모라가 되지 않기 위해 영적인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이 더 많이 등장해 교단의 잘못된 결정을 뒤집는 하나님의 승리가 오길 기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교회적인 부분에서는 보수적인 남부의 백인들이 가진 자존심과 생각을 내려 놓고 겸손하게 마음 문을 활짝 열어 타민족을 사랑하고 감싸는 교회를 만들어 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개인적으로는 후배 목회자들이 더 많이 루터교단에 가입해 한인 목회 및 미국교회 목회를 감당하는 목회자들이 많아지길 간구하고 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은퇴하기 전까지 최소 4~5개의 한인교회가 세워지고, 한인 목회자를 양성해 미국인 교회 목회를 할 수 있도록 밀어주고 싶다는 소망도 내비쳤다.
실제 박민찬 목사는 2010년 조지아한인루터교단모임(GA Korean Lutheran Association)를 창립해 2~3명의 목회자들을 초대해 기도를 시작했고, 이 모임을 통해 한인사회에 루터교단과 루터교회를 소개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그 열매로 3개의 한인 선교가 시작됐고, 미국교회 부목사 훈련을 받는 한인 목회자를 비롯해 몇 명이 한인선교를 위해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난 7월 17일 은혼식을 하게 된 권미연 사모와 자녀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나눠 달라고 했다.
"한국에서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에 저를 만나 결혼하면서, 안정된 교편 생활을 포기하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미국행에 온전히 함께하며 남편의 목회를 열심히 돕고 후원해 준 배필입니다. 묵묵히 늘 함께 해준 아내에게 정말 고맙습니다. 24살인 큰 딸 여주와 20살 아들 현광이가 아버지가 목회자라는 것을 알고, 둘 다 스스로 공부해서 받는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한번도 속 썩인 적이 없습니다. 큰 애는 4년 내내 손 벌린 적 없는 효녀고, 작은 애는 품위유지를 해야 한다면서 소소하게 용돈을 타가는 불효자(?)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한인 2세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지금까지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봉사 헌신하고 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