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의 말씀 : 요 10:11-21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9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2. 시작 기도
아버지! 몸은 말씀 앞에 머무나 영혼은 막막하고 메마르기 그지없나이다.
아들의 수난 기사를 읽으면서도 잡념에 사로잡혀 냉담합니다.
주여, 마음이 살찌고 완악한 자를 징계하시고 심판하소서.
입술로는 하나님 외에 소망이 없다고 하나 마음으로는 사람과 존재물에 소망을 두려는 자를 멸하소서.
나를 향해 손짓하며 내 영혼을 미혹하는 문들이 많사옵니다.
그러나 나의 문은 아들의 문이요, 십자가뿐이옵니다.
온갖 잡념으로 오염된 심령, 보혈로 씻어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나이다.
오직 아들을 힘입어 당신께 나아가는 종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가난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회복시키소서. 나의 소망, 하나님 외에 없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예수께서 안식일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자의 눈을 뜨게 하셨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안식일을 범한 죄인으로 규정하고 눈뜬 자를 심문하였다.
그러나 눈뜬 자는 그들을 반박하고 결국 공동체에서 내어쫓김을 당하였다.
이를 두고 예수께서는 보지 못하는 자는 보며 본다고 하는 자는 맹인이라고 하셨다.
눈뜬 자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보게 되고 믿게 되었다.
반면 유대인들은 알고 본다고 확신하였다. 그것도 성경, 곧 모세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러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세가 예언한 참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 본다고 하는 그들은 맹인이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고' 우리가 맹인인가?'를 묻는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양과 우리, 문과 목자의 비유를 통해 그들의 실체를 다시 밝힌다.
비유는 예수께서 양의 문(7-10절)이며 양의 목자(11-18절)임을 예시한다.
그가 '문'이라함은 그를 통해 지상에서 천상으로, 아래에서 위로, 세상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세상에서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먼저 그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양의 목자가 된다.
나는 선한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11절).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가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들을 흩어버린다(12절).
그가 달아나는 것은 삯꾼이어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13절).
나는 선한목자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나를 안다(14절).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15절).
내게는 이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우리 안을 인도해야 한다.
그리하면 그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마침내 목자와 한 무리가 될 것이다(16절).
내가 목숨을 버리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 목숨을 다시 얻으려는 것이다(17절).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가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18절).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 사이에 다시 분쟁이 일어났다(19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그가 귀신이 들려 미쳤는데 왜 당신들은 그의 말을 듣소?'라고 말하였다(20절).
또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은 귀신들린 말이 아니오. 귀신이 어떻게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소?'라고 말하였다(21절).
예수께서 신적 계시의 용어인 '나는 이다'(헬, 에고 에이미)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나는 선한 목자다'라는 선언은 '나는 문이다'라는 선언과 병렬을 이룬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오셨고 다시 그리로 돌아가신다(13:1).
그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셔서 그를 믿는 자를 아버지 집으로 인도하신다(14:6).
이는 그가 모든 사람을 그리로 이끄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이다(12:32).
곧 그의 죽음 안에 연합된 자는 창세전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을 얻는다(3:15; 딛 1:2).
그러므로 '내가 문이다'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는 십자가 죽음을 뜻한다.
이로써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아들 자신을 말한다.
도둑과 강도는 양들의 생명을 빼앗으나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삯꾼이 아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며 양도자기 양이 아니다.
그래서 이리가 오면 양을 두고 도망가며, 이리가 양들을 물어가고 흩어지게 한다.
이리는 양들을 오도하며 사망으로 이끄는 거짓된 영적 지도자를 표상한다.
그런 지도자들은 신자들을 속이는 말로 미혹하여 주님이 아닌 자기를 따르게 만든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행 20:29-30).
그런데 삯꾼이 이리 앞에서 도망하는 것은 그의 성품과 양과의 관계로 인함이다.
즉 삯꾼은 양을 돌보기보다 자기를 돌보는 탐심이 가득하며 양과의 관계도 생명의 관계가 아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라 양들을 버린다.
하나님의 아들은 선한 목자다. 그는 자기 양을 알고 양도 그를 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아시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아버지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은 창세전부터 현존한다.
여기서 '알다'(헬, 기노스코)는 서로 사귐을 말한다.
창세전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을 주셨다(5:26).
아들은 아버지께로부터 태어난 자, 유일하게 아버지의 생명을 받은 독생자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존재하였으며 아들은 아버지의 영광을 받아 누렸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은 그 본질에 동일하지 않으며 일치하지도 않는다(위르겐 몰트만).
아들은 아버지께 복종하고 아버지는 복종하는 아들을 사랑 안에 거하게 하셨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15:10a).
곧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복종하는 것이며,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곧 '본질의 계시'이다.
이 본질의 계시를 가리켜 '영광'이라고 한다(요 17:24; 나를 사랑하사 내게 주신 영광).
이로써 아버지와 아들은 창세전 영원부터 복종과 사랑의 존재법으로 함께 하셨다(1;1).
다시 말해 아버지와 아들은 창세전부터 본질적 사랑의 교차 속에서 현존하고 계신다(17:5).
아들이 양을 알고 양들이 아들을 아는 것도 이와 같다.
영생 얻은 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신 자이다.
그는 아들에게 복종함으로써 아들의 사랑 안에 거한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5:10).
영생의 본질은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이다(17:3).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서로 사귐, 서로 사랑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귐과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이로써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영광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아들이 양을 알고 양도 아들을 아는 것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17:24).
그런데 아들은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도 인도하신다.
'이 우리'는 이스라엘 또는 유대 공동체를 말하며 다른 양들은 이방인들을 말한다.
선한목자는 먼저 택함 받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
그의 십자가 죽음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이 허물어졌고 그의 십자가로 둘이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그들이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서 속하게 하셨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17:23).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유대인과 이방인)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4-16).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아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다.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와 사랑의 관계 안에서 버리는 것이며 다시 얻기 위함이다.
누구도 그의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다만 그가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그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왜냐하면 이 계명은 아버지에게서 받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려 한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는 그들에게 죽임당하셨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가 아버지께 대한 복종 안에서 자원하여 되어진 일이다.
이렇게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복종 안에서 행위의 완전한 자유를 행사한다.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뜻인 죽음까지도 자유롭게 받아들인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이기는 것, 이것은 아버지를 사랑하여 그에게 복종하는 데에서 오는 위대한 힘이다.
그런데 아들의 복종은 십자가상에서 일회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창세전 아버지께로부터 생명이 태어났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일어난 아들의 복종은 삼위일체의 신적인 삶을 형성하는 본질적 사랑의 교차 속에 창세전부터 포괄되어 있었던 것이다'(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
그러므로 아들의 죽음으로 영생을 얻는 구원은 창세전 아들의 영원한 순종 안에 내포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은 목자와 문의 비유를 듣고 다시 분쟁을 한다.
이제 그들은 도둑이요 강도로 판명이 났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은 아들을 가리켜 귀신들려 미쳤다고 말한다.
자기들의 참상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아들을 미친 사람 취급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그를 미쳤다고 할수 없다고 반론한다.
선한목자는 오직 한 분,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뿐이다.
구약성경에서 목자는 하나님 자신을 말하거나 메시아를 예표하는 다윗으로 일컬어졌다.
먼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목자로 묘사된다(시 23:1; 80:2; 사 40:11; 렘 31:9).
또한 다윗이 목자로 묘사됨으로서 목자는 다윗적인 메시아이다(시 78:70-42; 겔 37:24; 미 5:3).
한편 하나님은 지도자들을 세워 목자의 사명을 위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다윗적 메시아가 오기까지 패역한 목자로 전락한다(렘 2:8; 10:20; 12:10; 겔 34장).
결국 하나님은 신실하지 못한 목자들을 폐하시고 친히 목자를 세우신다.
"내가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들이라 내가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합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새,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제거하였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슥 11:7-8).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슥 11:16).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선한 목자로 세우셨다.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목자로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먼저 자기를 위해 죽어주신 아들을 알고 그의 양이 되어야 한다.
그 때 그도 역시 형제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가 된다.
그는 진실로 선한목자 되신 아들의 친구가 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5:13-14).
4. 나의 묵상
나는 철저히 기만 속에서 신앙하고 목회하였다.
성도 때에는 선한 목자를 찾아 전전하였고 특히 담임목사가 선한 목자임을 확신하였다.
내가 목사가 되어서는 나 스스로 선한 목자임을 자부하였다.
그런데 나는 삯꾼일 뿐이었으며, 나아가 나를 위해 성도들을 이용한 이리와 같은 자였다.
특히 사람들을 이끌어 내게로 오게 하는 것이 본심이었다.
사람들을 속일 수 있어도 어찌 성령을 속일 수 있다는 말인가!
오늘 말씀 앞에서 깨닫고 보니 나는 먼저 선한목자 되신 주님의 양이 되어야 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알듯이 아들을 알고 아들의 아신 바 되어야 했다.
그것은 창세전 복종과 사랑으로 존재해 오신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이며, 나 또한 그 사귐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이는 아들의 죽음 안에 연합되어 얻은 영생의 본질이다.
영생에 무지한 채 신앙하고 목회한 자, 어찌 삯꾼과 이리의 본성을 피할 수 있었겠는가!
10여 년 동안 십자가 신앙에 멈춰버린 나!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지 않으니 다시 세상에서 허우적거렸다.
성경을 설교하나 영생의 실제가 없으니 결국 돌고 돌아 인간사, 세상사로 귀결되었다.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영생, 복종하여 사랑 안에 거하는 실제가 없으니 하나님의 일을 억지순종으로 해냈다.
그것도 생명을 주는 일이 아니라 인간사, 세상사를 하나님의 일로 오해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영생의 사귐,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복종은 죽는 것도 자원함으로 되어진다.
아들에 대한 복종은 목숨을 내어놓는 죽음까지도 완전한 자유가운데 행하게 한다.
거기에 어떤 원망과 시비도 없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2-14).
영생의 삶에서 복종의 본질은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 나아가는 팔레시아에 있다.
큰 자나 작은 자나 하나님을 아는 복종은 새 언약 안에 머무는 조건의 규정이다.
생명 얻은 자로서 이 복종, 팔레시아가 가장 힘겨운 싸움이고 고통이다.
그런데 이 복종 안에서만 죽기까지 순종하는 일도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그래서 어둠의 세력은 이 복종을 저지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오늘도 나는 팔레시아의 복종 앞에서 싸우는 자이다.
잡념이 가득한 가시떨기 같은 심령이 나를 삼키려한다.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아들의 수난이야기를 읽는데도 감각이 없다.
이미 배부르고 살찌고 완악하게 되어버린 내 심령을 보고 통회한다.
이 복종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그 무엇을 자유롭게 순종할 수 있겠는가?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자유롭고 그렇지 않은 것은 억지이다.
국제시장이란 영화가 벌써 천만 관객을 넘었다고 한다.
영화 속의 주인공은 전쟁 때 생이별한 아버지의 말을 따라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본다.
그러기 위해 자기 인생을 다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에게 애환으로 회환으로 남았다.
그는 환상속이나마 아버지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으므로 고생을 보상받는다.
그렇다!
나는 주와 복음을 위해 사는 인생으로 부름 받았다.
어린 시절, 아니 중년까지 품었던 내 인생을 위한 꿈을 버렸다.
그러나 날마다 팔레시아의 복종을 하지 않으면 억지 순종이 뻔하다.
내 눈과 마음은 다시 세상을 향하고 그들의 형통을 부러워한다.
팔레시아의 복종으로 아들을 알고 아버지를 알 때, 비로소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로 자리매김을 한다.
죽기까지, 그리고 죽음으로써 주님을 사랑하는 선한목자의 반열을 사모한다.
5. 묵상 기도
아버지...
선한 목자를 꿈꾸며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때는 제가 선한 목자인줄 알았습니다.
하오나 삯꾼은 고사하고 이리와 같은 자였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저를 배불리고 내 인생을 위해 돌진하는 자였습니다.
주님의 양이라는 생각보다 나를 위한 양이라는 생각이 더 컸습니다.
오, 주여! 몰각한 목자가 받을 것은 심판과 사망뿐이었습니다.
그런 자를 심판하신 당신은 참되고 의로우시나이다.
아버지여...
진멸 받아 마땅한 자에게 긍휼이 임했습니다.
선한 목자되신 아들이 저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주시고 아버지와 아들을 알게 하셨습니다.
창세전 복종과 사랑 안에서 하나 되신 그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진실로 다른 우리에 있는 양을 불러내셔서 당신의 품으로 이끄셨나이다.
아버지...
이제는 복종 안에 거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살기 원합니다.
복종은 죽음까지도 자유롭게 받아들이게 하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복종을 저항하는 세력이 제게 강렬합니다.
날마다 아들을 힘입어 당신께 나아가는 팔레시아를 저지합니다.
외적인 시간은 있으나 내적인 갈등, 근심, 번민이 그러합니다.
주여, 십자가에 나를 못 박습니다. 온전히 못 박습니다.
팔레시아의 복종, 그것은 죽음까지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승리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당신 앞에 가는 그 날까지 이 복종 안에 거하게 하소서.
아들을 알고 그로 인해 아버지를 아는 영생의 투혼을 붙들어 주소서.
당신의 성실하심은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서형섭 목사는... 한국외대에서 경영학(B.A.)와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MBA)를 졸업하고, 서울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M. Div.)을 공부했다. 논문 '말씀묵상을 통한 영적 훈련'(Spriritual Training through Meditiatioin on the Word)으로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 Min.)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 2000년 반석교회를 개척하고, 치유상담연구원에서 6년간 수학 후 겸임교수를 지내며 동시에 한국제자훈련원에서 8년간 사역총무를 역임했다.
현재 서형섭 목사는 말씀묵상선교회(http://cafe.daum.net/wmmission) 대표로 섬기며 특히 '복음과 생명', '말씀묵상과 기독교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저술과 세미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말씀묵상이란 무엇인가>(갈릴리, 2011년)과 최근 출간된 <복음에서 생명으로>(이레서원, 2013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