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의 말씀 : 요 8:12-20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19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2. 시작 기도
아버지! 광야의 순전함은 쇠락하고 바벨론의 탐심이 고개를 쳐듭니다.
야곱이 돌아가야 할 곳은 세겜이 아니라 벧엘이었습니다.
하오나 그는 세겜에 정착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창 33:20).
그곳에서 재앙을 만나 뉘우치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주여, 세겜의 야곱처럼 되어가는 자, 티끌과 재를 무릅쓰고 엎드리나이다.
'까닭 없이 주를 경외하리이까?'라는 사탄의 참소를 당할 길이 없나이다.
알몸의 인생, 광야의 순전함으로 나를 돌이키소서. 너무 많은 것들이 주어지고 말았나이다.
내가 내 마음을 두고 머물 곳, 아들이 있는 곳에 아들과 함께 있어야 할 곳입니다.
이는 창세전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여 그에게 주신 영광을 보는 자리입니다.
세겜의 피 흘림보다 더욱 추하고 더러운 영혼, 보혈로 씻어주시기만을 원합니다.
내 주님 속히 오소서! 그리하여 죄의 세력이 지배하는 죽을 몸을 구원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예수께서 초막절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그의 가르침은 그에게 아버지가 그에게 명령하신 영생이다(12:50).
영생의 가르침은 창세전 영원부터 함께 해 오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 영화, 사귐이다(17:5).
아들은 창세전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딛 1:2; 요 5:24).
이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으로 실재된다(17:3).
아들이 주시는 영생의 말씀은 아들이 영광을 받으신 후 보내실 성령으로 생명이 된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며, 생명의 말씀 자체인 '살'(육)은 무익하다(6:63).
영이 역사하는 아들의 말씀이 생명이다(6:63;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
아직 영이 역사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무리들에게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아는 영적 수준으로 그의 가르침을 논박한다.
특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반박한다(7:52).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될 것이다"(12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될 수 없다"(13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비록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내 증거는 참되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14절).
너희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15절).
그러나 내가 판단하면 나의 판단은 참되다. 그것은 나 혼자서가 아리나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판단하시기 때문이다(16절).
또한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이 증거하면 참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7절).
내가 나의 증인이며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내게 대하여 증거해주신다"(18절).
그러자 그들이 예수께 물었다.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나와 내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를 알았을 것이다"(19절).
이 말씀은 그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를 붙잡는 사람이 없었다.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20절).
예수께서 다시 자기를 계시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이는 요한복음의 전형적인 문체인 '나는 ~이다'의 용례이다.
6:35;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다.
10:7,9; 나는 (양의) 문이다.
10:11,14; 나는 선한 목자이다.
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5:1,5; 나는 포도나무이다.
'나는 이다'(헬, 에고 에이미)는 구약성경에서 신적 자기계시의 언어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 이름을 계시하시는 데, 이는 '나는 나다'이다.
히브리어로 '에히예 아세르 에히예'이며 로마자 표기로 '야훼'(YHWH)이다(출 3:14).
이것을 70인역(헬라어)으로 읽으면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가 된다.
'나는 무엇이다'가 아니라 '나는 이다'는 특정한 이름으로 한정될 수 없는 무한정자로서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자기를 계시하신다. 아들은 세상의 빛이다.
창세전, 태초부터 아들은 말씀으로 현존하신다(1:1).
그 아들은 만물을 지으셨으며 그 안에 생명이 있다(1:3).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다(1:4).
요한복음에서 사람들은 세상으로 치환되어 사용한다(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러므로 세상의 빛은 말씀이며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다.
창세전 만물 위에 속한 말씀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한 것은 빛이며, 그 빛의 원형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런데 이제 아들을 통해 모든 사람(세상)에게 비추어진다.
이 빛은 아들의 말씀이 되어 인격적으로 주어진다.
이 빛을 따르는 자, 곧 아들의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생명(영생)을 얻는다.
그러므로 이 빛은 본질적으로 생명이며, 생명을 주는 빛이다(생명의 빛).
빛 되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성, 의미, 목적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인간 존재를 밝히신다(라이트후트).
그래서 이 빛을 비추어지지 않으면 인간은 실존의 어둠속에서 유리방황한다(창 4:12; 안식 없는 방랑자).
바리새인들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예수의 증거를 즉시 부인한다.
이는 그가 스스로 증거하기 때문이요, 한 사람의 증거는 용납할 수 없는 율법에 의해서이다(민 35:30; 신 17:6).
이에 예수께서는 두 가지 논점으로 그들의 말을 반박하신다.
첫째, 다른 사람과 달리 그는 자신의 기원과 운명을 다 알고 있다.
인간은 그가 어떻게 해서 '현재의 시간'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다음 순간 어디로 가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그 양극단은 출생이전의 자리와 죽음이후의 자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예수께서는 그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
그로 인해 자신에 대해 참되고 믿을 만한 증거를 댈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예수께서는 홀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아버지가 그와 함께 하신다.
바리새인들이 인간적으로 볼 때 그는 혼자 있으나 실상은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
이로써 그들이 율법을 근거로 주장하는 '둘 이상'의 증거가 확보되는 셈이다.
따라서 아버지 안에서 갖는 아들의 기원과 목적은 진리를 증거하고 판단하는데 있어서 그의 활동을 정당화시켜 준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다시 시비를 하며 묻는다.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이해했다고 파악한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자기들의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41절).
이에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말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주장은 예수에 의해 반박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42절).
그들은 아들을 알지 못하고 따라서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아들을 알았더라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결국 아버지에 대한 질문의 우매성은 그들이 예수를 알지 못하는 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예수를 영으로 알고 그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알았다면 그들은 또한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 말씀은 성전의 헌금함이 있는 앞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성전에는 헌물을 거두어들이기 위한 13개의 소파르(궤)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그 궤들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도 가까이 해야 했으므로 여자의 내실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은 성전 내실이 어떤 곳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는 요한복음에서 자주 거론되는 질문으로 기원과 목적에 대한 중대한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7:27-28).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7:34-3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8:14).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9:29-30).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13:36-37).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14:4-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16:5-6).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19:9).
예수를 아는 것은 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아는 자이다. 곧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3:3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요일 2:13).
예수께서 어디에서 오셨는가?
그는 하늘, 만물 위, 위, 태초, 창세전의 세계에 현존하신다(1:1).
창세전 아버지는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을 아들에게 주셨다(5:26).
아들은 아버지께 복종하는 사랑을(15:10). 아버지는 복종하는 아들에게 자기의 본질을 계시하는 사랑을 하셨다(1:18).
이 사랑은 아들에게 주신 아버지의 영광이다(17:24).
인자는 거기로부터 오셨다(3:13).
그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땅에서 들리신다(3:14).
곧 십자가에 죽으시며 그 때에 모든 사람을 그리로 이끄신다(12:32).
그리고 그의 죽음 안에 연합된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3;15).
그는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가 오셨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신다(13:1).
그 곳은 아버지 집이며, 그가 보내실 성령으로 그를 믿는 자를 그리로 이끄신다(14:2,6).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셔서 영으로 생명을 얻은 자, 그는 아들이 거하는 곳에 거한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17:22-24).
그리고 아들을 아는 자는 아들의 계시로 아버지를 알게 된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17:25-26).
아들은 창세전 영원에서 오셨고 그리로 돌아가신다.
이는 그를 믿는 우리를 창세전 영원의 아버지 집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영광을 보게 하신다.
이것이 영생의 실재로서 하나님과의 사귐이다.
4. 나의 묵상
나는 오래도록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었다.
그러나 나는 예수를 알지 못했고 따라서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다.
나는 창세전, 영원, 태초, 만물 위, 로고스(말씀), 생명, 빛에 대해 무지한 자였다.
다만 예수를 육신으로만 알아 그의 공생애 삶을 모방하기에 급급하였다.
빛이 비추지 않으니 어둠의 인생이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인생, 안식 없이 유리방황하는 자였다.
기독교는 분명 알파와 오메가, 그 시작과 끝이 분명하다고 들었는데 알 도리가 없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창세전 영원의 세계, 아버지 집이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 집을 알지 못하는 인생, 그는 고아와 다름없다(요 14:18).
집을 나간 탕자가 되어 세상 사람이 주는 것을 얻어먹으며 비참하게 살았다.
그것마저 없어서 황폐하게 되자, 비로소 아버지 집을 향하였다.
돌아보니 모든 것이 그 분의 손이 이끄신 은혜였다.
아버지와 탕자 사이에 그리스도가 계신다.
하늘에서 오신 그가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나를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셨다.
하나님 자신도 아들의 죽음으로 자기를 의롭게 하셨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창세전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영광을 보는 자 되었다.
이 모든 일은 무지와 무능, 가난이 실제 된 초탈의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야곱이 홀로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집을 떠났다.
그는 광야에서 노숙하며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다(창 28:19).
그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서원하고 떠났다.
20년만의 귀향, 네 명의 아내와 열한 아들, 딸, 많은 종들과 수많은 재산을 가지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말이다(창 33:20).
그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재앙을 당한다. 그제야 벧엘을 기억하고 그리로 올라간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새벽 2시반 일어났다.
그것은 광야의 순전함을 잃어가고 있는 비참한 모습으로 인해서였다.
숱한 무화과 잎이 벗겨진 채 알몸이 되고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나를 선명히 기억한다.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광야에서 밤을 새던 날이 어제 같다.
그곳에서 영원을 보았고,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을 보았다.
야곱의 20년은 커녕 이제 7년이 지났다.
광야의 순전함은 쇠락하고 다시 바벨론의 명성에 기웃거린다.
나를 합리화하며 보혈의 은총을 남용하는 자신을 보니 경악한다.
거룩하고 경건한 일상이 퇴락하는 모습을 대하며 전율한다.
사람이 늘고 육신이 편안해지고 여건이 좋아지니 자고함이 하늘을 찌른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세겜의 징계보다 더 큰 징계를 목도한다.
아, 과연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을까!
사탄의 참소는 계속되며 그것을 막을 방도가 없다.
그런 참소에 합당한 자로 전락한다.
주의 성령, 그 이끌림으로 광야로 나가기 원한다.
사역도 사람도 그 성과도 다 지나가니 부질없다.
부처 역시 고통의 근원을 목마름이라고 하였다.
그 목마름을 보이는 것, 지나가는 것, 변하는 것으로 채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하였다.
그의 깨달음은 분명하나 길은 없다. 어찌 인간이 스스로 그 길을 내겠는가!
탕자 되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다.
다 내려놓고 아버지 집으로 들어간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이다. 거기로부터 왔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 아버지 집으로 간다. 오늘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다.
5. 묵상 기도
아버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자였습니다.
예수를 안다고 하였으나 모르는 자였습니다.
그의 기원과 향방을 알지 못하니 아버지도 모르는 자였습니다.
이생의 목적을 위해 예수를 믿고 성경을 이용하는 자였습니다.
어둠에 속한 자, 당신의 진노와 심판이 합당한 자였습니다.
아버지여...
심판을 통해 무지와 무능, 가난의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그 초탈의 자리에서 영생을 얻고 영원을 보았나이다.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사랑하고 영광중에 거함을 보았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던 자에게 생명의 빛이 비추었나이다.
내가 있어야 할 곳,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중에 있는 그곳입니다.
창세전 영원의 세계, 만물 위에 세계, 내 아버지 집입니다.
날마다 아들을 힘입어 그리로 들어갑니다.
의심의 안개 걷히고 근심의 구름 없는, 기쁘고 참된 평화가 거기만 있습니다.
아버지...
하오나 티끌과 재를 무릅쓰고 긍휼을 기다립니다.
광야의 순전함이 쇠락하고 바벨론의 음녀에 미혹됩니다.
다 지나가고 말 것들에 집착하며 거기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제게 있어야 할 곳을 망실한 채 세상과 재물과 명성과 안정에 마음을 두고 있나이다.
주여, 이 곤고한 자를 심판하소서. 당신의 채찍으로 치소서.
당신 외에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거두어가소서.
그리하여 광야의 순전함을 회복시켜 주소서.
오직 말씀만으로, 당신 안에 거하는 그것으로만 기뻐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서형섭 목사는... 한국외대에서 경영학(B.A.)와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MBA)를 졸업하고, 서울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M. Div.)을 공부했다. 논문 '말씀묵상을 통한 영적 훈련'(Spriritual Training through Meditiatioin on the Word)으로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 Min.)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 2000년 반석교회를 개척하고, 치유상담연구원에서 6년간 수학 후 겸임교수를 지내며 동시에 한국제자훈련원에서 8년간 사역총무를 역임했다.
현재 서형섭 목사는 말씀묵상선교회 대표로 섬기며 특히 '복음과 생명', '말씀묵상과 기독교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저술과 세미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말씀묵상이란 무엇인가>(갈릴리, 2011년)과 최근 출간된 <복음에서 생명으로>(이레서원, 2013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