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신학단상' 은 평신도들의 신학적 소양 함양(涵養)을 위해 각종 행사 등에서 신학자 및 목회자들의 발제문을 뽑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지난 9일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세미나실에서 열린 한국교회사학연구원·한국기독교사학회 '월례세미나'에서 발표한 '한국기독교의 건국이념'을 주제로 발표한 교회사학연구원 실행위원인 김명구 박사의 발제문을 연재합니다. 그 마지막 순서. <편집자주>
4. 경제 정의에 대한 문제
해방 직후, 신의주 제이교회 목사 한경직은 신의주 제일교회의 윤하영 목사 등과 기독교사회민주당을 만들었다. 원래는 기독교민주당이라고 불렀는데 "북한 인민의 전적인 포섭을 위해서" 기독교사회민주당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전략의 차원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한경직의 경제사상에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토지를 일본의 대지주에게서 환수해서 소작농에게 맡겨야 하지만 기업은 개인이 하는 것 보다는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월남한 직후, 한경직은 강력한 반공이념을 확립하고 구제와 구호활동에만 치중했지만 그의 정치사상이나 경제사상이 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주장했던 '기독교 건국론'에서 알 수 있다. 한경직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인권 평등사상의 원천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이 가는 곳마다 인간의 죄와 무지와 정치적 사회적 모든 구속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남존여비의 사상이 타파되었으며 만인 평등의 사상이 사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민주주의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전에 토마스 헉슬리의 말과 같이 성경은 가난한 자와 피압박자의 대헌장입니다. 인간은 성경 없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유의 대헌장인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성경은 박애와 자선사업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한경직이 주장하는 성서중심의 기독교 건국이념에는 당시의 민족적 당면과제였던 가난 극복도 들어 있었다. 그에게 있어 사회의 모든 영역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해 있었고 그래서 적극적 참여를 주장하였다.
한경직의 이러한 이상은 그가 1946년 10월에 영락교회의 베다니학생회가 개최한 특별 기독학생 부흥회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강사는 한경직을 위시하여 김재준, 배민수, 고황경 이었다. 그리고 부흥회의 주제는 "사상계도"였다. 그는 여기에서 각 학교 내의 기독학생회 조직을 만들고 우익 학생들과의 유기적 관계를 맺고 합세하여 '건설 학생연맹'을 결성하는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한경직이 초대한 강사들은 장로교 내의 보수계열이 아니었다. 특히 배민수와 베다니 학생회의 고문이었던 박학전은 사회복음주의자들로 1930년대의 장로교 농촌운동의 주역이었다. 일제하부터 이들은 강력한 반공과 함께 경제적 나눔을 강조했다. 이들에게 있어 극복해야 할 적대적 사회악은 "유물주의 적마(赤魔)"와 함께 "황금만능의 이기주의", 곧 공산주의와 이기적 자본주의였다. 이들은 소련 공산주의의 이념을 거부했지만 자본주의의 모순도 경계하며 경제적 배분정의가 실현되기를 소망했다. 그것이 이들이 생각했던 예수의 경제관이었다.
1945년 9월 8일에 열린 한민당 발기인 대회에서는 여운형과 박헌영의 인공(人共)타도와 중경의 임정(臨政)지지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대중 본위의 민주주의 제도에 기초한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가 수립과 '전 국민의 자유로운 안전 보장' 등을 선언하였다. 자유민주주의적 노선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날 채택된 한민당의 5대 강령 중 세 번째 강령은 미국 자본주의 것이 아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셋째 강령은, 근로계급의 복리를 증진할 사회정책의 실시다. 민주주의는 경제에도 적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자익부(富者益富)하여 빈자익빈(貧者益貧)하며 부자는 정권을 농락하여 자기 계급의 이익만을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는 자본주의 경제제도는 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토지는 농민에게 균분해 주어야 하며 대기업은 국유 혹은 국영으로 하며 근로계급에는 생활의 안정과 경제적 균점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육?보건의 기회균등은 이것을 실행치 않으면 안 된다.
한민당의 정치와 경제 이념, 곧 자유민주주의 관(觀)과 경제정의 이념을 정립한 인물은 장덕수였다. 그는 1920년 8월에 미국의 의원들이 방한(訪韓)했을 때, 미국이 민주주의의 모범이며 한국을 도와 독립과 민주주의 체제를 실현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더욱이 13년간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대학원 기간 동안 영국에서 체류하며 영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연구했다. 미국과 영국사회, 영미의 민주주의와 그 정치 구조에 대해 장덕수만큼 파악하고 있던 인물도 드물었다.
에머슨(R. W. Emerson)의 기독교 사상에 심취했던 장덕수는 인간의 덕성과 완전성, 인간 의지의 자유, 이에 수반한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역설하며 기독교의 본질은 내세를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서의 선(善)을 실현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민주주의가 기독교로부터 비롯된다고 믿었던 장덕수는 민주주의가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며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요구 사항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 충분히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곧 "모든 국민을 위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보장할 확실한 권리 체계"라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아래 장덕수는 매우 이례적으로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을 한민당의 목적으로 삼게 하였다. 따라서 '근로 대중의 복리 증진을 기함'과 "토지를 농민에게 균분"해야 하는 문제는 보수정치의 근본이념이요 가치가 되었다.
한민당은 독점자본을 제압하여 근로 대중의 생활 안정을 도모해야 민주주의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 경제적 민주주의는 그 정책에 있어서 사회주의의 계획경제와 일치된 점 없지 않다"고 설명하였다. 자본주의제도의 허점, 곧 빈익빈?부익부의 현상을 초래하는 폐단을 인정한 것이다.
한민당은 원칙상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나 대기업은 국가경영으로 하여 대자본의 절제를 기하고 토지는 대토지 소유를 금지하여 자작농 정도로 할 것을 주장했다. 이를 구체화한 정책으로 '중공주의'(重工主義), '중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을 내걸었다.
그때 한민당에서는 "소작권 설정에 의한 국유제"를 주장했다. 소작료를 1/3로 제한하면 이익이 발생하지 않아 지주들이 농지를 시장에 내놓게 되고 자연스럽게 땅값이 내려가게 된다는 시장경제원리를 생각했다. 그 내려간 땅값을 국가에서 유상으로 매입한 후, 농민에게 유상으로 분배하겠다는 발상이었다. "농민은 대금으로 하여서 일정한 기간에 일정한 수량을 납입하여 소득권을 취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토지의 사유제를 표명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지주에게서도 산업 자본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 그들이 자연스럽게 상공업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주장을 폈다. 토지 매수 대금을 현금으로 지급하지 않고 공장 또는 공업 자재 등으로 환산해 주어 자연스럽게 산업화를 유도하겠다는 방안이었다. 지주계층이 민족자본을 이루었고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방직공업 등, 근대식 경영을 해 본 경험자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한민당의 토지개혁 방안은 지주제 몰락이나 전체주의적 평등주의 실현이 목적이 아니었다. 농지개혁을 통해 사회경제적 공정(公正)을 이루고, 토지자본에 편중된 당시의 경제를 산업자본화 하려 한 것이다.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산업화를 이루고 이것을 근거로 하여, 모든 국민들이 공평하게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대자본, 대지주에 통제정책을 써서 근로계급의 생활을 보장"한 것이다.
흥사단계의 경제정책도 한민당의 것과 기본적 인식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유주의 원리에 입각해 전문경영인의 자율성을 존중하였다. 그 대신 노동조합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적 노동정책을 주장했다. 미군정청 노동부장 이대위는 민주주의국가의 기간이 되는 노동자들이 인격적?경제적으로 압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극소수 브르주아의 독재정치를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노동자의 경제적 자주성, 사회적 복리, 정치적 훈련을 도모하려는 것이 노동정책의 목표라고 피력하였다. 노동자 보호입법을 통해 사용자의 자유에 일정하게 제한을 두어야 함도 주장했다. 그리고 경제 독점으로 힘없는 대중들의 도덕적 자유가 침해를 받으면 국가가 나서서 그 폐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토지개혁 문제에 있어서도 한민당의 제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토지개혁 과정에서 농지를 매각한 지주계급의 상공업 전환에 대한 지도방책을 세워 중산계급의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 보수정치의 원류였던 한민당과 흥사단계는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며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자유," "모든 국민을 위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보장할 확실한 권리 체계"를 지향했다. 이들의 의식에 한 사람의 전횡이나 한 계급의 독재가 허용될 수 없었고 모든 국민, 각 개인의 생명과 재산, 자유가 보장되어야 했다. 모두 기독교적 의식이요 성서적 지식의 바탕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의 이런 인식이 건국이념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5. 여언(餘言)
1919년 4월 11일에 가결된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은 기독교가 한국의 정체, 곧 '민주공화제'를 설정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은 중경정부에 이르기까지 5번이나 헌정을 개정했지만 계속 유지가 되었다. 해방 후에도 대한민국 헌법 제1조로 계속되고 있다. '민주공화제'라는 표현은 동북아의 어느 국가의 헌법에도 나오지 않는 표현이다. 이 임시헌장 제정을 주도하고 있던 조소앙의 무오독립선언서에서도 나오지 않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 표현이나 사상이 기독교로부터 나온 것임을 이광수는 1917년 7월, 잡지 『靑春』 9월호에, 자신이 발표했던 "야소교(耶蘇敎)의 조선(朝鮮)에 준 은혜(恩惠)"를 통해 진술한 바 있었다.
더욱이 이규갑 감리교 목사가 이끌고 있던 한성정부의 약법 제1조가 "국체ㄴㆍㄴ 민주제를 체용ㅎㆍㅁ"인 것을 보면 분명히 '민주공화제'의 표현과 민주주의 사상은, 한국 역사에 있어서, 기독교적 언휘와 사상이었던 것이다.
해방 후, 한민당과 흥사단의 인물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로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뚜렷했고, 특히 공산주의가 민주주의를 훼손시키는 이데올로기라는 데에 이의가 없었다. 서구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근대적 인권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국제 감각과 세계성의 인식이 확고했다. 이들의 이러한 의식은 기독교로부터 각인되었고 이들은 자신들의 이상과 일치한다고 보아 미군정에 적극 협조한 것이다. 이들의 자유민주주의관은 건국이념이 되었다.
기독교 내부에서는 공통적으로 공산주의가 교회와 교회가 내세우고 있는 민주주의 의식을 해친다고 믿었고, 그러한 인식하래 철저한 반공을 내세웠다. 그런데 그것은 유물주의 자체가 기독교에 대한 도전이었고 공산주의자들로 교회가 배격당하고 공격당했던 역사적 경험으로 인한 것이었다.
연정회나 신간회 등 일제하의 민족운동을 통해서 공산주의의 실체를 경험했던 기독교 민족주의계는, 특별히 해방 정국에서, '반공'을 최우선의 가치로 내걸었다. 한국교회는 광복 후 북한에서의 공산정권의 만행을 목도하면서 그 반공의식을 더해갔다. 한경직을 비롯한 교회의 인물들은 민주주의 세계의 건설을 위해 공산주의를 타파해야 함은 물론 공산주의자들과는 어떠한 타협이나 합작이 있을 수 없다고 인식했다. 남다른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한국 기독교계는 반공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것이다.
한편, 한국 보수정치 원류의 중심에 있었던 기독교 민족주의계는 사회주의적 요소의 경제정의를 주장했다. 송진우가 처음 사용한 "경제민주주의"라는 명칭은 이들의 민주주의관의 정체를 알려준다. 이들은, 자유주의 원리를 근간으로 했지만, 노동자의 경제적 자주성과 사회적 복리도 주장하였다. 원칙상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나 대기업은 국가가 경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대자본의 전횡도 막으려 하였다. 그리고 대토지 소유를 금지하여 자작농 정도로 할 것을 주장했다. 독점적 자본을 제압하여 근로 대중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들의 의식 속에 있는 성서적 인간관, 곧 신부적(神賦的) 인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끝>
발제ㅣ김명구 박사(교회사학연구원 실행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