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신학단상' 은 평신도들의 신학적 소양 함양(涵養)을 위해 각종 행사 등에서 신학자 및 목회자들의 발제문을 뽑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지난 9일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세미나실에서 열린 한국교회사학연구원·한국기독교사학회 '월례세미나'에서 발표한 '한국기독교의 건국이념'을 주제로 발표한 교회사학연구원 실행위원인 김명구 박사의 발제문을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1. 서언(序言)
한국 기독교는 특별히 건국과정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이승만이나 김구, 김규식이 기독교 건국론을 주장했고, 건국의 주역들 중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상해임시정부에서의 활동했으며 YMCA을 중심으로 했던 흥업구락부나 서북지역을 근간으로 했던 흥사단 등의 계보와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나름의 기독교 사상 아래 민족운동이나 정치활동을 해왔던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모두 친미적이었고,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을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내세웠다. 기독교인로 정치의 일선에 있던 인물들은 교회가 설정한 방향과 다르지 않게 행동하였다. 곧 영미식 민주주의와 반공을 건국의 목표로 설정한 것이다. 물론 영미식 민주주의, 곧 자유민주주의의 개념에 대한 이해는 개인이나 계보별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반공과 더불어 자유와 기회균등, 개성을 존중하는, 곧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이들의 일치된 목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사회 일각에서, 기독교회나 그에 속한 정치 그룹들이 친미적 성향을 지적하면서, 이들 그룹들이 일방적으로 군정의 노선에 따랐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렇지만 교회나 교회에 속한 이들은 정치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을 추종하거나 미국의 정책에 순응해서 민주주의나 반공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다. 특별히 기독교 일각에서는 이미 개화시대부터 민주주의를 갈망했으며, 기독교가 민주주의 국가를 이룰 수 있게 한다고 믿고 있었다. 또한 교회뿐만 아니라 YMCA나 흥사단과 같은 기독교사회단체들, 배재학당, 이화학당, 경신학교, 숭실학당 등 미션스쿨에서도 자유 민권사상, 만민평등사상,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관 등 가르치고 있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공산주의를 경험한 이후, 한국 기독교는 공산주의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반공의식은 그때부터 생성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가 미국을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것은, 미국의 정책이나 이념이 자신들이 이미 확보하고 있던 것들과 일치한다고 믿었고 미국이 기독교회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기독교계가 미군정, 혹은 미국 정부의 가치관을 일방적으로 따르지 않았음은 기독교회나 교인들이 갖고 있던 경제관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이 소고는 기독교의 건국이념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기독교 건국론을 주장하였던 이승만이나 김구, 김규식에 대한 것은 지양하고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민족운동을 했던 기독교 내부의 민족주의계, 곧 기독교 민족운동의 양대 세력 중 하나로 이승만을 지지했던 YMCA계와 계보적 대척(對蹠) 집단이었던 흥사단 혹은 수양동우회계의 건국이념을 다루려고 한다. 또한 기독교회의 대표적 인물로 광복 직후 정치 활동 경험이 있었고 건국이념을 직접 언급한 한경직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한국 기독교회의 건국 사상이 밝혀지면 그것이 향후 대한민국 정치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도 짐작하게 되리라 믿는다.
2. 한국 기독교의 민주주의 발현
2.1 임시정부 시절의 기독교
1919년 4월 13일에 공식 출범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임시 의정원을 구성하였고 적지 않은 의제와 의안을 토의하고 통과시켰다. 여기에서 1919년 4월 11일에 제정된, 전체 10조로 구성된, 임시헌장을 조완구의 동의와 조소앙의 재청으로 가결시켰다.
임시헌장의 사전심사는 신익희, 이광수, 조소앙이 맡았다. 임시헌장은 1918년에 조소앙의 무오독립선언서를 기초의 일부로 하였다. 이 임시헌장을 무오독립선언서와 감리교의 이규갑 목사가 이승만의 대리인으로 있던 한성정부의 약법(漢城政府約法)과 내용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도표에 나와 있듯이 대한민국 임시헌장 뿐만 아니라 이승만이 주도하고 있던 한성정부는 뚜렷이 민주주의를 정체(政體)로 내걸고 있고, 자유와 평등의 민권사상을 표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관심있게 보아야 할 것은, 상해임시정부가 제1조로 내세우고 있는 '민주공화제'의 명칭이 한성정부의 '민주제'와 함께, 헌정제정에 있어 주도적 역할을 했던 조소앙의 기존 인식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해혁명 후에 제정되고 있던 중국의 수많은 헌법 문서들 가운데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독창적인 명칭이다.
감리교 목사인 이규갑이 대행하고 있던 한성정부의 약법 제1조가 "국체ㄴㆍㄴ 민주제를 체용ㅎㆍㅁ"인 것을 보면, 적어도 한국 기독교계 내부에서 '민주주의'라는 표현과 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불교와 천도교, 기독교 등 각 종교를 두루 편력한 바 있던 이광수는 이미 1917년에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개성의 자각, 우(又)는 개인의식의 자각이외다. 원래 야소교는 개인적이외다. (중 략) 유교도덕은 개인의식을 몰각(沒却)케 합니다. 이 개인의식의 몰각(沒却)이 사상의 발달을 저해함이 다외(多外)하외다. 그러나 야소교는 각 개인이 기도와 사색으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찾음으로 각 개인의 영생을 얻을 수 있다 합니다. 그럼으로 각 개인의 표준은 각 개인의 영혼이외다. 각인은 각각 개성을 구비한 영혼을 가진다함이 실로 개인의식의 근저외다. 신(新) 윤리의 중심인 '개성'이라는 사상과 신(新) 정치사상의 중심인 민주주의라는 사상은 실로 야소교리(耶蘇敎理)와 자연과학의 양원에서 발한 일류(一流)외다.
조소앙과 신익희와 함께 임시헌장 제정에 참여했던 이광수는 한국에서의 개인주의와 '민주주의' 사상이 기독교로부터 나왔다고 진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임시정부의 헌장 제1조, 곧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은 이광수의 주장에 의해 기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이 기독교로 인한 것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다. 중경정부에 이르기까지 5번이나 개정을 했지만 제1조는 계속 유지가 되었고 해방 후에도 대한민국 헌법 제1조로 계속되고 있다.
한편, 한국 기독교회는 한국의 근대교육을 선점하였다. 1885년 광혜원을 시작으로 설립된 미션스쿨과 개교회에서 운영하는 남?녀학교 등이 그것이다. 1909년에 이미 장로교가 719교에 학생수가 17,231명이었고, 감리교가 200교에 학생수가 6,423명에 이르고 있다. 특별히 기독교회는 이 근대교육을 통해 하나님 아래에서 누구나 수평적 관계라는 '인간평등 의식'을 가르쳤다. 타인에 대한 존엄성을 강조했고 개인을 향한 복음의 약속된 가치 강조, 개인의 평화 누릴 권리와 존중의식을 함께 가르쳤다. 그리고 그것을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의식으로 각인시켰다. 이렇게 민주주의 인식을 확보한 임시의정원의 기독교계 인사들은 특별히 개인의 자유와 '평등'부분을 각별히 강조했고,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채택하는 데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2 해방 직후의 기독교계
해방이 되었을 때, 미군은 한국에 대해 무지에 가까운 상태로 입국했다. 일본과 한국의 차이도 제대로 구별하지도 못할 정도여서 9월 20일경까지 한국의 치안을 일본 경찰에게 위임해야 했다. 그런데 미군정은 1945년 9월 11일에 일본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를 파면하고 17일에는 국장급에 미군들을 임명했다. 그리고 10월 15일에는 김성수를 위원장으로 하여 조만식, 여운형, 송진우, 전용순 목사, 김동원 목사, 이용설 세브란스 의전 교수, 오영수, 김용무 변호사, 강병순, 윤기익 목사를 미군정장관 고문으로 위촉했다. 그리고 군정장관 비서장과 민정장관 보좌관에 이교선을 임명하였고 윤보선을 비롯하여 이매리, 양주삼 목사 등을 중앙행정기관의 고문, 김광현 목사, 정기원, 김정기 등을 지방행정기관의 고문에 임명하였다. 조만식과 김동원을 제외하고 모두 기호 민족주의계로 분류되는 인물들이었다. 또 정일형을 비롯해 이묘묵, 이용설, 길원봉, 오천석 등 다수의 서북계를 실무진으로 채용하였다.
1946년 12월부터 8월에 이르기까지 군정청에 임명된 군정 각 부처의 초대 한국인 국장 13명 가운데 7명이 기독교인이며, 이들 전원이 미국 유학출신자들이었다. 초대 차장 9명중에는 4명이 기독교 신자였고 1명의 천주교 신자가 포함되어 있다. 초대 처장 6명중 2명이 미국유학을 마친 기독교인이었다. 또한 1946년 12월 7일 발표된 입법의원 90명중 21명(23%)이 기독교 민족운동 내부에서 활동하던 기독교인이었다. 해방 당시 기독교인의 인구 대비 비율이 남북한 합해 2% 이하였음을 감안하면 초기 건국이념을 정할 때에 기독교계의 영향력이 적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건준을 탈퇴하고 한민당에 입당한 김준현은 "민주주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 좌익계열에서는 공산주의적 독재를 의미하게 되나, 민주주의를 세계에서 널리 쓰이는 의미로 해석하고 상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자유를 기초로 하는 것"이라고 하여 영미식 민주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 해방 직후, 영미식 민주주의에 대해 제대로 이해했던 정당이나 정파는 이승만을 추종하였던 한민당과 도산 안창호의 후예인 흥사단계가 유일했다.
1945년 9월 6일의 한민당 발기인 총회에서 서구식 민주주의 정체(政體)의 실현과 정착을 기대를 표출하였는데, 미군정 당국도 한민당을 "교양 있고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정당이라 여겼다. "영어에 능통하고 민주정치이론에 밝은 인사들"로 보았고, 동아일보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독교인들이고 YMCA계들이어서 이들을 신뢰했다. 곧 송진우(宋鎭禹), 김성수(金性洙), 서상일(徐相日), 장택상(張澤相) 등의 동아일보계와 YMCA계의 결사조직인 흥업구락부계인 구자옥(具滋玉), 유억겸(兪億兼), 김준연(金俊淵), 허정(許政), 백관수(白寬洙), 김도연(金度演) 등과 YMCA계의 또 다른 비밀 결사조직인 청구구락부 출신의 장택상(張澤相), 장덕수(張德秀), 여기에 기호계 민족주의 계보였던 김병로(金炳魯), 원세훈(元世勳) 등이 한민당 창당을 주도했다. 동아일보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독교 민족주의 계보아래 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민족운동에 가담했던 인물들로 서로 절친했고 계층적 이해관계가 잘 들어맞았다. 대부분 해외유학을 했던 지식군들로 근대 서구사회를 경험했던 인물들도 많았다. 기독교 사상이 투철했고, 특히 공산주의가 민주주의를 훼손시키는 이데올로기라는 데에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다. 서구 문명에 매우 긍정적이었고 근대적 인권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국제 감각과 세계성의 인식이 확고했다. 1920년부터 이들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기반한 입헌정체를 구상하고 있었다.
한민당 정강의 실질적 입안자인 장덕수는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호를 통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입각한 국민의 정치 참여와 의회정치에 기반한 입헌정체의 실현을 역설한 바 있다. 그는 사유재산제를 근간으로 하는 신도덕사회 건설을 외쳤는데 민주주의가 바로 그런 사회이고, "인류생활의 일대 원리"이며 "인격에 고유한 권리"라고 주장하였다.
9월 8일의 한민당 발기인 대회에서는 여운형과 박헌영의 인공(人共)타도와 중경의 임정(臨政)지지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대중 본위의 민주주의 제도에 기초한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가 수립과 '전 국민의 자유로운 안전 보장' 등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입헌정체와 정당정치, 의회민주주의 등 영미식 자유민주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한편, 흥사단계 지식인들은 연합국의 승리를 독재와 전체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로 규정하였다. 이들에게 있어 일본의 전체주의적 제도법규나 획일적 집단동작의 청산은 자유민주주의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조건이었고 생소했던 서구식 의회제도와 정당정치에 대한 교육과 계몽은 당시 흥사단 활동의 주요 목적이었다.
민주주의의 기본 요건으로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행동의 자유를 중요시 여겼고 개성의 발휘와 서로 다른 개성이 조화하는 것이 민주사회 발전의 생명력이라고 보았다. 그렇지만 자유와 방종을 엄격히 구분하며 책임을 강조했다. 여기에 민주정치의 안전망으로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에 기초한 상호 견제와 균형을 제안했다. 여기에 다당제에 기초한 대의정치를 강조했고 민주주의의 발전이 정당의 건전한 발전에 달려 있음을 주장했다.
1946년 9월 28일에 흥사단은 제1차 국내대회를 열고 "모든 방법으로 민주주의에 기초한 정치훈련을 적극 실천할 것"을 행동강령의 하나로 채택했다. 자유주의 원리에 입한 민주국가의 건설이라는 대원칙에 의견을 같이 한 것이다. 그리고 개인에 대한 우위를 내세우고, 의회주의와 정당정치에 입각해 견제와 균형을 기조로 하는 민주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미국 유학 유경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해 친숙하였고, 이러한 인식에 따라 미군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미군정에 참여한 흥사단계 중 기독교 신학교나 미션스쿨 출신 일부의 군정청에서의 직위와 주요 학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위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미션스쿨 출신인 이들은 대부분 미국유학 경험자들이었다. 영어 구사력이 뛰어났고 기독교인들이어서 미군정과 친밀할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김훈, 오천석, 이대위, 한승인, 조병옥 등은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기 이전인 1945년 9월 4일경에 한미협회를 발족하였고, 9월 27일에는 하지중장을 찾아가 환영 메시지를 전달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이묘묵, 백낙준, 오천석 등은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를 발간하였다. 흥사단계와 미군정이 친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으로서도 미국식 민주주의에 깊은 이해를 갖고 있는 이들의 활용 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들 한민당이나 흥사단계는 한국이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자유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자주독립국가의 수립을 기대했다. 자유민주주의 의식이 이들의 건국이념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한편, 신의주에서 활동하다 월남하여 영락교회를 세운 목사 한경직은 "새 나라의 정신적인 기초는 반드시 기독교가 되어야 되겠"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핵심은 (1) 개인인격의 중심사상, (2) 개인의 자유사상, (3) 만인의 평등사상"인데 "이 사상의 근본은 신구약 성경"이며, "민주주의의 꽃은 민주주의의 밭에서만" 아름답게 필수 있기 때문에 "새 한국은 반드시 기독교가 그 정신적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게 있어 기독교는 민주주의 연원이었다.
당시 한경직은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일본점령정책의 목표를 "민주주의와 기독교를 가져다주는 것"이라 본 것에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실제로 맥아더는 일본이 물질적인 행정 지도만이 아니라 영적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자신의 일본점령정책의 목표는 일본에 "민주주의와 기독교를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기독교가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 혹은 발원지라는 한경직의 의식은 기독교계의 역사성 아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군정 사령관 하지와도 상통할 수 있었다. 군정 후기, 하지(John Reed Hodge)는 미군의 임무를 기독교 선교사와 비교하면서 자신들의 사명이 한국에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를 위해서 기독교와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인식을 전제로 할 때, 미군정과 기독교계는 '자유민주주의'를 건국이념으로 내세우는데 서로 긴밀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발제 : 김명구 박사(교회사학연구원 실행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