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둘째 아이가 묻습니다. "아빠, 하나님은 어디 있어요?" 저의 답은 아무 생각없이 습관처럼 나왔습니다. "어,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셔, 이 세상 어느 곳이든 하나님은 계셔." 저의 대답이 생각없는 답이어서 그런지 둘째 아이 또한 생각없이 이어 나온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디?"
백 번 듣는 것보다 실제로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의 뜻으로 우리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사자성어를 즐겨 사용합니다. 사람의 인지능력 중에 가장 탁월한 능력을 가진 것은 바로 시력입니다. 시력은 청력에 비해 그 능력이 10배가 탁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청력보다 10배나 우위에 있는 시력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멀리 있는 것도, 아주 가까이 있는 것도 보지 못합니다. 우주처럼 큰 것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세균처럼 미세한 것도 볼 수 없습니다. 태양의 빛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동굴과 같은 암흑 세계도 보지 못합니다. 내 몸 속을 들여다 볼 수도, 아무리 가까운 부부 사이라도 상대의 마음을 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 같으나 사람의 눈은 이처럼 실제로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인지능력은 지극히 제한적이며, 그 또한 불확실합니다. 사람의 인지능력 중 절대적이란 표현이 그래서 맞지 않나 봅니다.
어린아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 비해 훨씬 인지능력이 발달한 어른들에게도 보이지 않으십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믿음이 시작되며, 믿음의 교육이 시작됩니다. 사람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인식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합니다. 사람의 청력과 시력으로는 하나님을 도저히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고, 보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이 요구됩니다.
제 아이의 질문 속에서 떠오르는 성경 인물 중 한 명은 도마입니다. 도마는 본 것만 믿으려 했습니다. 그 이후 도마는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선물 받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선물이면서 또한 사람들의 인지능력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의 인지능력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마치 플러그가 발전소와 전자제품 사이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 발전소가 있음을 믿습니다. 플러그를 통해 컴퓨터에 전원이 켜지게 하기 때문이며 그것을 사람이 인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맹신과 믿음은 다릅니다. 무조것 믿으라고 하는 것은 전혀 인격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에게 맹신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믿음을 위한 인식의 근거로 성경을 주셨습니다.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것은 인격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믿기 시작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사람들은 더욱 하나님에 믿음이 맹신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고, 맹신보다 더 큰 믿음을 품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계세요?" 라고 질문한 제 아이는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그래서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아이의 인지능력을 위해 성경과 아이 사이에 말씀의 실체인 삶의 본이 있어야 합니다. 삶을 통해서 성경을 읽게 하는 것입니다. 삶을 통해 성경을 보고,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몫이 먼저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의 몫입니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하나님은 어디계세요?" 라고 묻는 세대가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ㅣ곽영구 목사(미국 조지아주 빌립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