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윤정희는 1933년부터 1942년까지 약 10년간 남만주 봉천지역 한인동포교회에 파송된 선교사다. 윤선교사 파송에는 3년이 걸렸다. 1931년 장로교 여전도회가 재외 동포교회에 선교사 파송 계획을 수립하면서 선교비 400원을 적립하더니 1932년에 남만주 한인 동포교회로 선교지를 확정하고 여선교사 모집을 광고하였고, 1933년에 와서 제6회 장로교 여전도회 총회는 윤정희를 파송키로 결정하였다.
윤정희의 파송은 김순호 여선교사의 파송 직후에 이루어졌다. 장로교 여전도회가 중국인을 대상한 소위 타민족 선교를 목적하고 김순호 여선교사를 파송하던 1931년에 재중 동포교회에 눈을 돌려 우리 민족에게도 선교사 파송을 결정하였다. 그 해에 상당한 선교비를 적립할 만큼 급박하게 해외선교가 추진되었다. 김순호가 타민족인 중국인을 위한다면 다음 차례는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를 위해 선교사를 파송하자는 의견이 우세했을 것으로 본다. 동포애가 적극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보면 되겠다. 바울도 선교 초기에는 자기 민족에게 복음을 전했다.
장로회 여전도회가 남만주 봉천지역을 선교지역으로 선정한 데는 당시 만주사변과 무관하지는 않다. 1931년 9월 18일 일본군이 만주철도를 폭파하고서는 중국군이 한 짓이라고 구실을 만들어 군사행동을 일으켜 이른바 류타오거우 사건이 발생했고 이후 일본군의 만주 침략전쟁이 계획한 바 대로 본격화 되었다. 한인동포사회와 한인동포교회가 있는 남만주는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남만주가 최우선적인 선교지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윤정희의 파송이 여전도회와 장로교 총회의 공동작품이었던 것은 위에서 소개한 김순호여선교사의 파송과 같았다. 여전도회는 선교사 선정과 선교비를 부담하고, 장로교 총회는 총회 선교사로 파송을 공식화했던 것이다. 윤정희의 사역지는 봉천을 중심하여 동으로 무순 지방, 서로는 봉천 서편 농촌, 북으로 북만과 내몽고, 남으로 안산 요양이었다. 남만주는 실로 수천리나 되었다.
윤정희는 남만주 일대를 순회 여행하다가 한 지역을 지정하고 1주일 혹은 2주일씩 거주하면서 한인여성을 중점적으로 사역을 펼쳤다. 윤정희는 부인사경회, 부인 전도회, 야학, 전도 강연회 등 집회사역을 통해 성경이나 통신과를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집회사역이 여성 사역자를 배출할 수 있었음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집회 사역 뿐만 아니라 심방과 개인전도도 병행하여 개인 훈련을 등한시 하지 않았다. 문서전도도 윤정희의 선교전략에 중요한 부분이었다. 전도지의 경우 매일 열장씩 배부하였고, 성탄절에는 성경과 찬미책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중보기도는 윤정희의 선교 전략에서 빼놓을 수없다. 1938년 5월 10일자 "기독교보"에는 만주 중부 지역 "각처에 일할 것이 많으나 일군이 심히 부족한데 많이 위하여 기도하고 도와주기를 바란다"는 보도는 일군에 있지 않고 기도에 있었다.
1933년부터 1938년까지 약 5년간의 윤정희의 선교의 결과는 대단했다. 한인 노회가 탄생되고, 집회사역을 통하여 배출한 여성 교역자가 개 교회 여전도사 수급이라는 이변을 일으켰다면 하나님께서 윤정희를 어떻게 사용하셨는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1936년 4월에서 6월까지 석 달간 다섯 지역을 여행하면서 사경회를 개최하고, 약 90호 한인 가정을 심방하며, 300장의 전도지를 배부하면서 20여명의 새신자를 얻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자가 50여명이라면 윤정희의 헌신을 짐작할 만하고, 무엇보다도 윤정희의 선교전략을 연구할 만하다.
1940년 안식년 후 1941년 다시 선교지로 돌아갔으나 신병을 얻어 환자로 귀국한 윤정희는 1942년에 와서 선교사 사면이 불가피했다. '병든 몸'이 선교사 사면을 재촉한 직접적인 원인중 하나라고 강하게 주장한다면 억지일까?
장로회 여전도회는 윤정희 선교사를 평양 병원에 입원시키고, 김마리아, 김선경, 한경신등 관리 위원을 선정하여 윤선교사의 병치료를 돕는가 하면, 그 동안 밀린 사택비와 치료비의 잔금을 지불하는 등 자비를 베풀었다. 그런데 선교사 후생관리가 아직도 숙제로 남아있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글ㅣ손상웅 목사(SEED선교회 연구실장·풀러신학교 선교역사 전공·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