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1912년 조선장로교회는 총회를 조직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해외선교를 계획하였고 조선 500년의 근간이 되었던 유교에 빚을 갚는다는 취지로 유교를 창시한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동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다. 이에 박태로와 김영훈과 더불어 1913년 6월에 장로교 신학교 6회로 졸업한 사병순 목사가 파송되었는데 이는 그의 첫 번째 선교사역이었다. 그런데 중국선교는 열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전 준비가 부족했고 현지 유교 문화 적응이 어려웠는데다 풍토병과 언어 장벽까지 겹친 사병순은 동료 선교사와 함께 2년 만에 선교지를 떠났다.
이즈음 하나님께서는 사병순의 제2의 선교사역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펼쳤다. 1920년 8월 15일에 딴뉴바(Dinuba) 한인기도처는 150명의 교인이 모여 6명의 장로와 6명의 안수집사를 선출하고 전 중국 산동 선교사 사병순목사를 설교목사로 받아들여 미주 내 최초의 한인장로교회로 조직되었다.
미국장로교 1921년도 총회록 193쪽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증언함으로써 총회적 차원에서 그를 선교사로 환영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사병순의 이름과 그의 사역은 당시 미주한인에게 유일한 길잡이였던 신한민보에 자주 거명되었다. 사병순은 딴유바 국민회가 마련한 1923년 삼일절 기념예식에 기도를 담당했고, 1923년 8월 4일 하오 7시30분 딴뉴바 한인교회와 부인애국단이 공동 주관한 김마리아 선생 환영회에서 사병순은 기도순서를 담당했고, 이어 다음 날인 8월 5일 부인애국단 제5주년 기념식에서 기도순서를 맡았고, 1924년 로스엔젤레스 삼일절 행사에서 기도순서를 맡았고, 여자애국단원들과 함께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발로 뛰기도 하였다. 이에서 사병순은 딴뉴바 교회 목사이자 미주 한인 이민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1923년 봄 딴유바에 홍역이 유행하였을 때 고통 받던 한인동포의 자제들을 심방하여 위로하고 쾌유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1923년 7월 7일에는 열차와 자동차의 충돌사고로 빚어진 한인동포 이무경과 박화준의 장례일정을 눈물로 집례하였는데 이때 참석한 국민회 총회장 최진하와 1923년 딴뉴바 교회 주일학교 교장 최능익은 사병순의 대표적 동역자다. 1918년 12월 맨티카예배당건축을 위하여 사병순이 1원을 헌금하였다는 1918년 12월 12일자 신한민보와, 1923년 가을에 이르러 사병순 목사가 "내지 수재 구제" 구제금으로 2원을 기부하였다는 신한민보가 남아 있어 그의 실천적 참여를 엿볼 수 있다.
사병순의 3기 선교사 사역은 중국 사역으로 1924년 이후다. '교역자가 공석 중이던 천진한인교회 예배를 인도하며 수고하였다'고 보도한 1937년 1월 19일자 기독신보만이 그의 선교활동을 확연히 알고 있을까 알려진 바가 없다. 사병순은 1944년 8월 9일 외동딸 사인애가 살던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월하리 88-30번지에서 소천하였다. 사병순의 외손자 김희준의 증언에 따르면 강원도 금화경찰서 고등 경찰계에서 혹독한 고문조사를 받다 풀려나 한 달도 되지 않았던 67세의 사병순은 철원읍 중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사병순이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했고, 1922년 아내의 죽음을 지켜내지 못했고, 고명딸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사병순을 생각하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글ㅣ손상웅 목사(SEED선교회 연구실장·풀러신학교 선교역사 전공·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