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초등학교 때 짝사랑을 한 적이 있었다. 80여명의 남녀 애들이 한 반에 같이 공부할 때 한이라는 성을 가진 여학생을 너무도 사랑했다. 흰 살결에 늘씬한 키, 밝게 웃는 걸죽한 얼굴, 오똑한 코, 유난히 반달처럼 생긴 눈으로 웃을 때 나는 그녀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전율을 느꼈다. 더욱이 공부를 잘해서 부 반장을 했다. 그 녀와 같이 6년을 한 반에서 공부하면서도 좋아한다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졸업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시골 5일장에 쌀을 메고 가다가 반대쪽에서 오는 그 애와 마주쳤을 때 너무도 놀랬다. 몇 년 사이에 성숙해진 모습도 나를 당황하게 했지만 쌀을 지고 5일장에 가는 내 모습은 너무도 초라했다. 몇 발짝 지난 후 뒤를 돌아보는데 그 녀도 역시 뒤돌아보는 것이 아닌가! 그 때 손이라도 한 번 흔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도 아쉽게 생각되지만 그 때의 그 얘는 지금 파파 할머니가 되어 어디서 살고 있을까? 나는 그 녀의 외모와 영리한 면을 혼자서 짝 사랑했다.
짝사랑을 받은 경우다. 신학교 때, 나에게 매력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데 죽자살자하고 따라 다닌 처녀가 있었다. 그녀의 눈에 무엇이 씌어 있었나보다. 자주 전화하고 편지 보내고 만나면 맛있는 음식 사주고 간접적으로 사랑의 표시를 하지 만 그럴수록 나는 싫었다. 이유는 나의 이상적인 여자가 아니고 더욱 가난 한 내 주제에 만나도 차 한 잔 살 돈이 없는 가난뱅이가 무슨 사랑이냐가 밑에 깔려 있었다.
한 번은 등록금을 낼 날자가 다가와 걱정하는 나에게 어디 장학금을 알아보자고 한다. 며칠 후 연락이 와서 나갔더니 어느 독지가가 무명으로 준 장학금이니 쓰라고 내민다. 나는 감사 하며 등록을 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안 것은 그녀가 받은 장학금을 나에게 주고 자기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휴학계를 내고 다음 학기에 등록해서 일 년 후에 졸업했다. 그 후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나가 봉사활동을 하다가 그 곳에서 죽고 또한 그 곳에 묻혔다.
나는 속죄 하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선교헌금을 보내주며 빚을 갚도록 했으나 너무 냉정했던 것 같아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그녀는 나에게서 무슨 장점을 봤을까? 후문에 의하면 나에게는 남 다른 표현력이 있다고 칭찬을 했단다. 하기는 신학교의 설교 대회를 비롯해 전국 남녀 대학생 웅변대회에서도 일등을 했으니까! 그녀는 그 것들을 알고 짝사랑 한 것 같다.
성공하는 짝 사랑도 있다. 자신의 사랑을 받아드리지 않으면 자살 하겠다고 공갈치거나, 반대로 상대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든가 돈으로 매수해서라도 자기사람으로 만드는 일이 있으나, 보다는 좋은 방법이 있다. 즉 상대자를 선택하는 기준을 외모나 재능 학벌 돈 가정배경 같은 것을 잡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것은 후차적이어야 한다. 차라리 사람 됨됨을 봐야한다.
미스터 k는 어린 나이에 부모 따라 미국에 이민 와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고 좋은 직장에서 한국말도 잘하는 멋진 총각이다. 그 주위에는 버금가는 좋은 신부감이 줄을 섰다. 그런데 K씨는 남들의 예상을 깼다. 지방대학을 나오고 남미에 선교사로 나가 빈민굴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고아들을 위해 봉사하는 아가씨를 선택했다.
이유는 자기와 결혼 후에 남들에게 도움을 주며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 목표는 적중했다. 두 사람이 한 짝이 되어 자녀들을 잘 키우고 더욱 주위에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고, 오지에서 지금도 봉사활동 하는 선교사들에게 기도와 헌금을 보내주고 양쪽 부모님께 그렇게 효도를 잘 할 수가 없다. 그 부부는 너무도 행복하다. 나를 위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들을 자진 짝을 찾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지만, 차라리 내가 반려자를 기쁘게 해 드리고 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해서 남들을 섬길 짝을 찾아 사는 부부가 될 수는 없을까? 있다 안 하는 것뿐이지!
글ㅣ현순호 목사(실리콘밸리노인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