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손상웅 목사] 유안심은 조선여전도회연합대회가 파송한 4번째 여선교사다. 1936년 중국에 세 명의 여성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던 본 대회는 한 명의 여선교사를 더 파송하기로 결정하였고 1937년 유안심이 파송받는다.
조선여전도회 연합대회는 총회와 밀접한 유대를 지속하면서 세계선교에 임하고 있었다. 이는 풀러 신학교의 폴 피어선이 주장하는 선교구조와 회중구조의 원만한 협력의 결과라고 해서 과장이 아니다. 특별히 조선 여전도회 연합대회와 총회간의 협력과제는 인선과 구역이었다. 제25회 조선예수교 장로회 회의록는 다음과 같이 협력관계를 밝힌다: "북만노회 구역에 여전도사 일인 파송키로 하는 바 인선과 구역은 내지 전도부와 협의 작정하여 속히 파송하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오며...." 그런데 조선여전도회 연합대회가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해외선교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폴 피어선의 주장대로 선교구조가 선교역사를 만드는 독특한 구조임을 단적으로 보게 된다.
북만주 지역에 파송할 여선교사의 자격기준이 특이했음은 다음의 기독신보 광고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북만의 여전도사 될 자가 누구뇨? 장로회 여전도 연합 대회에서 모집. 조선 예수교 장로회 여전도 연합 대회에서는 북만주에서 활약할 부인 사역자 한분을 모집하기로 결의하고 지금 인선 중인데 만천하 독자의 소개를 바라며 또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몸을 바치고자 하는 독지가는 원산부 명석동 김마리아 씨에게 원서를 제출키를 바란다 하며 규정은 대략 여좌함.
<규정>
1.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자로서 독실한 신앙을 가진 자.
2. 중등 이상의 학식이 있고 고등 성경 학교 혹은 신학교를 졸업한 자.
3. 내외지에서 현재 교역에 종사하는 자로 과거 2년 이상의 교역한 경험이 있는 자.
4. 연령은 30세로 40세.
5. 사채가 없는 자.
6. 자기 지방 목사의 천서와 졸업한 신학교 혹은 성경 학교장의 천서 또는 건강 진단서, 민적 등본, 사진 1매 요함.
위에서 게재한 규정에서 시사하는 특이점이란 첫째, 중등교육이상의 학력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 둘째, 남자 교역자가 아니라 여성 교역자라는 점, 셋째, 현재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자라는 점, 넷째, 최소 2년 이상의 교역 경험자로 경험을 중시했다는 점, 다섯째, 3, 40대로 제한하여 초년생을 제외하고 있다는 점, 여섯째, 사채가 없어야 한다는 점, 일곱째, 공채하고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건강진단에 합격한 자여야 한다는 점이다.
1937년 4월 18일 유안심 전도사가 북만주 여선교사로 파송받았다는 사실은 유례없는 엄격한 기준을 통과하였기에 유안심에게만 주어질 명예가 따로 있었다. 파송결정을 기재했던 기독교보에서 그의 명예를 쉽게 읽게 된다.
일은 사람을 기다리고 사람은 일을 찾는다. 적인을 얻어 적소에 보냄이 중요하다. ... 일개 잔약한 여성으로 거친 북만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유 전도사의 비상한 결심과 불타는 희생적 사명감에는 회중의 피를 밝게 하고 가슴을 조이게 하여 문자 그대로 영감에 싸여 식을 필하였다.
유안심 선교사의 업적은 1939년 북만노회장 전수창 목사의 보고가 대신한다: "본 노회내 각 교회가 ... 여전도대회 전도사업으로 교회가 왕성하오며 교인의 신앙이 독실하오며 개인 가정 연합으로 기도를 힘쓰며 성경을 매일 열람 주일학교 통신과 사경회등으로 열심히 공부하오며 각 교회 남녀 전도회와 연합 전도회와 희년 전도회 개인 전도등으로 열심전도하오며... "
건강했던 유안심 선교사는 열악한 선교 환경으로 인하여 병약하여 1939년에 귀국하였으나 그의 가슴에는 선교뿐이었다. 시국 관계로 앞당긴 1941년 9월부터 1942년 3월까지의 안식년 기간에도 유안심은 안식을 한 것이 아니라 안식을 반납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전국을 순회하며 선교보고와 선교동원에 힘썼다. 1942년 9월 23일에 선교사직을 사면하기까지 유안심의 선교는 중단됨이 없었다.
글ㅣ손상웅 목사(시드선교회 연구실장·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