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이만석 목사] 우리는 흔히 방송이나 매스컴을 통해서 혹은 무슬림 성직자들이나 이슬람을 연구했다는 전문가들로부터 "신앙심이 좋은 무슬림들은 절대로 테러를 하지 않는다"든가 또는 "테러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진짜 무슬림이 아니다"는 말을 종종 들을 수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일반적인 무슬림들은 그 말이 맞는다고 굳게 믿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는 모두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정설로 믿도록 매스컴과 학계를 속여 놓았기 때문이다.
이슬람에는 필요할 때는 거짓말을 해도 좋다는 타끼야(Taqiyya)라는 편리한 교리가 있어서 양심의 가책 없이도 얼마든지 거짓말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실제 사례를 살펴보면서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몇 년 전에 한국 이슬람문화연구소장을 지냈던 선문대학교 이원삼 교수는 KBS TV에서 방영하는 '책을 말하다'라는 프로에 출연하여 이슬람의 경전 꾸란에 대해서 50분간 소개한 적이 있다. 설명 중 그는 "비록 무슬림들이 간혹 테러를 저지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슬람을 테러의 종교로 오해하면 안 된다면서 "이슬람에서는 어떤 종류의 폭력이나 살인도 가르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라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 있다. 바로 꾸란5장32절이다. 그들이 인용하는 부분은 "무고한 사람 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모든 백성을 살해하는 것과 같다"는 부분만 인용한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과연 이슬람의 경전 꾸란에 그런 말이 있다면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가 맞는다고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 구절의 전부를 인용한 것이 아니라 가운데 토막만 인용한 것이다. 이는 알라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신 율법이라는 설명이 앞 부분에 있다. 여기서 무고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말은 무슬림을 의미한다.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만일 유대인들이 무슬림 한 사람을 살해하면 온 인류를 살해한 것과 같은 징벌을 가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이다. 무고한 사람이 무슬림을 의미한다는 증거는 바로 그 다음 절에 나온다. 아래 내용을 살펴보자.
실로 알라와 선지자에 대항하여 지상에 부패가 도래하도록 하려하는 자들은 사형이나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그들의 손발이 서로 대각선으로 잘리거나 또는 추방을 당하리니 이는 현세에서의 치욕이며 내세에서는 무거운 징벌이 그들에게 있을 것이다.(꾸란5:33)
여기서 '알라와 선지자에 대항하여 지상에 부패가 도래하도록 하려하는 자'란 무함마드를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는 비무슬림을 말하는 것이다. 비무슬림들은 사형이나 십자가에 못을 박거나 손과 발을 대각선으로 자르거나 추방하라는 것이 위 구절의 명령이다. 어떤 도덕적으로 범죄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알라와 무함마드를 거부하는 자들 즉 비무슬림들은 죽이든지 십자가에 매달든지 혹은 손과 발을 대각선으로 자르든지 가장 가벼운 처벌은 추방하는 것이다. 대대손손이 그 지역에서 평안하게 살던 사람을 단순히 무함마드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죽이든지 손발을 자르든지 그 지방에서 추방한다는 것이 폭력이 아니고 무엇인가. 모든 무슬림들이 테러범은 아니지만 지구상에서 발생하는 테러의 대부분은 무슬림들이 저지르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일들이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어떻게 이슬람에서는 어떤 종류의 폭력도 어떤 종류의 살인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이 '타끼야'란 것이다. 또 다른 예를 한 번 들어보자.
한국에서 대표적인 이슬람 홍보 요원으로 자처하면서 꾸란을 한국어로 번역한 명지대학교 아랍지역학과 최영길 교수가 번역해, 이슬람 책들을 주로 출판하는 '알림'출판사에서 제작한 '이슬람 원리와 개론'이라는 책 51면 '여성의 위상'이라는 부분에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이슬람에서의 여성은 이슬람 이전의 그 어떤 국가와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슬람이 남성과 여성에게 동등한 명예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라 하나님의 법 앞에서 남녀가 동등하고 현세와 내세에서 주어지는 보상과 벌이 동등하기 때문이다.
위의 책에서는 이슬람에서 남녀평등 사상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또한 여성도 남성과 동일한 권리를 갖노라"(꾸란2:228)라는 구절을 두 번이나 인용했다. 그러면서 타종교나 타문화권에서의 여성 인권유린 사례를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알라께서는 여성의 명예를 존중하셨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해 보자. 물론 이슬람권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여성 인권유린 사례를 얼마든지 인용하면서 이슬람에는 남녀평등사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있지만 위 책을 번역한 장본인이 번역해 놓은 꾸란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
이혼한 여성은 삼 개월을 기다리게 되나니 이는 알라께서 태내에 창조한 것을 숨기는 것을 막고자 함이라. 만일 그들이 알라와 내세를 믿어 남편이 돌아올 의사가 있을 때는 남편은 이 기간에 돌아올 권리가 있으며 또한 여성과 남성이 똑같은 권리가 있으나 남성이 여성보다 위에 있나니 알라는 만사형통하심이라.(꾸란2:228 최영길역)
위 구절은 이혼의 절차에 대해서 설명하는 구절이다. 이슬람처럼 이혼의 절차가 간단한 문화는 없다. 구두로 3회 통보하는 것만으로 그 이혼은 효력을 발생한다. 남편이 이혼을 선언할 때 꼭 정당한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다. 꾸란에 보면 아내를 바꾸고 싶다면 이미 줬던 재물은 빼앗지 말고 그냥 보내라(꾸란4:20)고 한 것을 근거로 생각해 보면 "나는 아내를 바꾸고 싶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이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내가 무슨 큰 실수를 했거나 손해를 끼쳤거나 등등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을 정도의 허물이 있어야 이혼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가진 통념이지만 이슬람에서는 이혼은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진 권리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위의 꾸란은 '이혼한 여성'이라고 번역해 놓았지만 사실은 '이혼 당한 여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이슬람에서는 여성은 이혼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랍어로 이혼을 딸락(Talaq)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남성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다. 여성은 이혼 당한다는 문장으로만 쓸 수 있다. 여성이 이혼한다는 개념은 없다. 그런데 위 구절은 이혼한 여성이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이것도 '타끼야'의 속임수라고 볼 수 있다.
이혼 당한 여성은 남편의 집에서 3개월간 기다려야 한다. 이것을 이혼 숙정기라고 하는데 아랍어로 '이따아'라고 한다. 너무 갑자기 이혼을 당하면 여인의 태중에 임신되었을 경우 남편의 아이와 함께 떠날 수가 있기 때문에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3회의 생리가 지나는 동안 남편의 집에 머물러 기다려야 하는 절차를 말한다.
그런데 그 기간 중에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의식주를 지원받을 권리가 있고 남편은 아내에게 복종 받고 존경받을 권리가 있다고 힐럴리 칸의 꾸란 주석에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기간 중에 남편은 언제든지 이혼을 취소할 권리가 있다고 본문은 설명하고 있다.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갑자기 이혼 당한다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일 것이다. 앞으로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이며 생계는 어떻게 유지될 것이며 온갖 생각에 인생의 기초가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여성과 남성이 똑같은 권리가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그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남성은 여성보다 위에 있나니'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구절이 어떻게 남녀평등을 증명하는 구절로 인용될 수 있는가. 이런 것을 이슬람의 '타끼야'(Taqiyya)교리라고 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이슬람 학자는 전주 이슬람 사원의 압둘 와합 자히드 박사다. 이 분은 세계 이슬람 연맹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한국 대표이며 그랜드 무프티(Grand Mufti)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지위를 가진 사람은 한국에 외국인과 한국인 무슬림을 통틀어서 이 사람 뿐이다. 이 지위는 전 세계의 무슬림들을 향하여 새로운 율법을 제정하여 공포할 수 있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권위를 가진 것을 말한다. 이 분이 유럽에 있는 아무개 씨가 이슬람을 모독하는 발언을 했으니 알라의 이름으로 죽이라고 파트와(알라의 이름으로 내리는 칙령)를 내리면, 전세계의 무슬림들이 달려들어 그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마치 전 세계 시야파 이슬람의 종주국인 이란의 이맘 호메이니가 영국의 소설가 살만 루시디를 죽이라고 명령한 것과 같은 권위다.
이분은 한국에 온지 30년이 넘었기에 벌써 오래 전에 한국 국적을 받았다. 그런데 몇 해 전에 전주 MBC에서 이분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이슬람 학자라는 것을 알고 취재하러 갔었다. 이분의 인터뷰 내용 중에 "이슬람에서는 한 번 결혼하면 절대로 죽을 때까지 이혼을 못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꾸란에 "이혼은 두 번까지 할 수 있다.(꾸란2:229)"고 기록되어 있다. 이슬람에서는 아내 바꾸기도 허용하고 있으며(꾸란4:20) 이혼할 때는 이렇게 하라는 것을 알려 주는 꾸란장(꾸란65장)도 있다. 이슬람권에서는 이혼이 너무 쉬워서 심지어는 휴대전화의 문자 메시지로 "이혼"이라고 세 번만 보내면 이혼이 성립되는 상황인데 이 분이 꾸란을 몰라서 방송에 나와서 그런 말을 했을까? 이슬람 홍보용 책을 수십 권을 쓴 최고의 학자가 어떻게 꾸란을 모를 수가 있을까? 그가 그렇게 방송으로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즉 '타끼야'라는 것이다. 알라, 무함마드, 꾸란, 이슬람 ... 등을 위한 거짓말은 알라께서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알라께서는 그대들의 맹세 시에 경솔한 말을 책하지 않으신다. 다만 그대들이 마음으로 행한 일만은 책하신다. 알라께서는 관대하시고 자비하시도다.(꾸란2:225)
여기서 경솔한 말이라고 번역한 것을 최영길 역 꾸란에서는 '비의도적으로 맹세한 것'이라고 번역해 놓고 있다. 어떻게 비의도적으로 맹세를 할 수 있을까. 맹세라는 것은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신뢰를 하지 않을 때 자기보다 더 높은 권위를 이용하여 의도적으로 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어떤 영어 번역본은 '진심으로 하지 않은 맹세는 알라께서 용서하신다'고 번역하고 있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본인만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타끼야' 교리에 의하면 무슬림들이 원할 때는 언제든지 '이것은 진심은 아니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눈을 부릅뜨면서 고함을 질러가면서 알라의 이름으로 맹세한다고 해도 알라께서 다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세계 이슬람화를 위하여 미화된 거짓 자료들을 계속 만들어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시중에서 파는 이슬람에 관한 책들은 무슬림 홍보용으로 철저히 타끼야 원칙에 의해서 미화된 것들이 대부분이며 그런 것들을 중요한 정보인양 발췌하여 그들의 거짓말을 대신 전달해 주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 위 글은 4HIM(www.4him.or.kr)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임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