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자녀를 주겠다는 약속은 이미 24년 전에 주어졌다. 그러나 자녀의 소식은 없고 하나님은 그저 자신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밝히신다. 약속도 지키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전능은 과연 어떤 속성일까? 왕주먹 같은 막강한 에너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휘감았을 법한 상황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런 전능한 자신 앞에서 행하여 완전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사람들 앞에서의 완전이 아니라 의와 진리와 거룩에 있어서 제한이 없으신 전능의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이다.
믿음의 조상도 심기가 많이 뒤틀렸다.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는 말은 이미 24년간 귓가를 맴돌던 상투적인 문구였다. 아브람의 아내로 하여금 그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라는 공약도 24년째 쳇바퀴만 맴도는 문구였다. 이에 믿음의 조상은 하갈을 통해 낳은 서자 이스마엘 삶이라도 형통하면 좋겠다며 말뿐인 하나님의 24년째 출산공약 불이행에 대한 서운함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중요한 믿음의 은밀한 테스트요 깊은 신앙에의 초청이다. 믿음의 조상에게 주어진 믿음의 테스트는 자신에게 어떠한 지각이나 경험이나 구체적인 선물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오로지 하나님 자신 때문에 행하여 완전함에 있어서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테스트다. 만만치가 않다. 더군다나 아브람은 심기도 불편하고 마음의 서운함도 극에 달한 시점이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의 믿음이 어떤 차원까지 이르러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초청이다. 땅의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 근거를 둔 신앙에의 초청!
태가 끊어지고 자녀에 대한 소망의 씨가 완전히 말라버린 상황 속에서도 한 아이의 아비가 아니라 여러 민족의 아비가 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전능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땅의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이나 사태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아니한다. 하나님은 비록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수십년째 성취되지 않고 성취에 대한 기대감의 기미도 종적을 감춘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전능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며 그분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처신에는 흠이 없는 신앙의 소유자가 되도록 믿음의 조상을 부르셨다. 이는 본문이 신앙의 깊은 테스트요 깊은 신앙에의 초청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삭이 주어지고 자신의 신앙을 뒤따르는 무리들이 중다하여 바닷가 모래의 수효보다 많고 하늘의 별들보다 더 헤아릴 수 없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전능을 믿는 믿음은 여전히 땅에서의 현상에 의존하는 땅의 신앙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루신 일들을 찬양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이루어진 일의 유무가 우리에게 신앙의 근간은 아니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아니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신앙은 경험 의존적인 신앙, 논리 의존적인 신앙, 이해 의존적인 신앙, 환경 의존적인 신앙이 아니라 계시 의존적인 신앙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되 성경에 계시된 그대로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보다 더 강하고 향기로운 신앙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테스트와 초청이 때때로 주어진다. 그때마다 '당황하지 않고'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항상 전능하신 분이시며 우리는 그런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한 삶의 여정을 주님 오실 그때까지 고수함이 아름답다. 하나님의 속성은 땅의 일로 인해 좌우되지 않는다. 혹 하나님의 속성과 상치되는 일이 땅의 현상으로 펼쳐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하여 그 현상을 해석함이 정당하다. 이는 인식의 등뼈를 통째로 교체하는 일이기에 믿음이 없는 분들에겐 상식의 숨통이 막히는 일이겠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속성이 땅의 현상에 언제든지 선행한다. 그걸 고수함이 교회와 세상 모두에게 유익이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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