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사형 추념의 날에 이어 오는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469회 탄신 기념일이다. 이때가 되면 나는 자부심과 함께 아쉬움이 엇갈리는 착잡한 마음을 갖게 된다.
워싱턴 지역은 충무공 이순신의 첫 해외 숭모교육의 발상지이자 메카라고 공인받을 만큼 그 분을 위한 의미있는 사업을 추진해 온 곳이다. 지난 2005년 워싱턴문인회가 이순신 문학상을 제정할 당시 필자는 문인회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면서 해를 거듭할수록 이 활동을 더욱 존중하고 애착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워싱턴의 이순신 문학교육 운동의 목적이 단순한 역사 문학활동이 아니라 성인의 경지에 이른 충무공 이순신의 모범적 인성을 연구하여 우리 차세대들의 결핍되기 쉬운 인성교육에 활용한다는 방향이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문학상을 주관하는 분들이 모두 한글교육과 한국문화의 보급에 앞장서 오신 분들이어서 자연스럽게 이순신 문학상이 전 미국의 한글학교에 확대되는 성과를 이루어 갈 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워싱턴에서 시작된 이순신 인성교육운동은 미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갔지만 이 문학상은 안타깝게도 5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단순한 문학상 시상행사라기 보다 충무공 이순신의 인성을 이땅에 교육하려는 목적이 더 컸기에 문학상 폐지는 너무나 아쉬움이 많은 일이었다.
그러면 왜 이순신인가?
충무공의 인성의 한 모습을 보면, 1592년 임진왜란의 시작과 더불어 2차 사천해전에서 이순신은 병졸과 나란히 뱃전에서 정신없이 활을 쏘다가 그만 적의 조총에 맞아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당한다. 그리고는 "한 여름 무더위에 상처가 생겨 진물이 흘러내려 발뒤꿈치를 적실 지경이었다."라고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큰일 앞에 장졸 위아래가 따로 없다는 솔선수범과 평등의 사상이며 인내와 책임감의 표본이 아닐까 한다.
한국에서 발행된 <한국역사 인물>을 보면, 단군 이후 한국인물 127명을 선정하고 인물마다 평균 2쪽 분량의 기록을 서술했다. 거기에 보면 한국의 얼굴이랄 수 있는 세종대왕이 4쪽의 기록으로 설명된 것에 비해 이순신의 기록은 무려 12쪽에 이른다. 인물마다 그리고 대개는 출생지이거나 또는 연고지에 한 두 기념물이 세워지게 마련인데 충무공 이순신의 기념물은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서울과 고향인 아산을 비롯하여 왜적을 물리쳤던 남해안 고을마다 포구마다 섬따라 동백꽃 처럼 피어 있으니 어찌 부질없는 셈을 할 것인가?
나는 한때 한국의 출판사에 관여했던 인연으로 지금도 서울의 출판사들과 교류하고 있는데 워싱턴의 이순신 인성교육운동 이야기를 듣고는 한국에서도 시도한 바 없는 그러한 발상이 어떻게 해외에서 먼저 일어날 수 있는가 하며 놀라움을 표시한 바 있었다. 워싱턴의 이순신 인성교육운동은 실상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시대를 앞서 갔던 것이다.
더욱이 이 운동의 선두에 섰던 지도급 인사들은 전 미국에 이순신의 인물을 확산시킨 이후 단계적으로 세계 5개 언어로 된 해외동포 어린이용 이순신 교육교재를 개발하여 세계화를 완성하겠다는 구상이었는데 함께 중단되고 말았다. 세계에 펴져있는 우리 한국계 어린 학생들에게 고국 성웅 이순신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무산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더구나 이 운동을 앞장서 추진했던 분들께서 이제는 노령에 접어들게 되어 이 귀중한 '워싱턴 이순신'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다.
워싱턴 이순신! 워싱턴 이순신이 전세계 한인 해외 동포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이순신 정신, 인성 세계교육본부>로 재탄생되어 큰 기여를 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어서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려 본다.
글ㅣ이은애 교장(美 버지니아 맥클린 한국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