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의 클라이맥스인 고난주간이 시작된다.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서는 밤을 기다려야 하듯이, 부활의 영광 찬송을 부르기 위해서는 고난의 가시밭길을 먼저 걸어야 한다.
안 하던 금식도 해 보고, 단 잠의 유혹을 뿌리치고 새벽 기도회도 나오면서 그 어느 때 보다 긴 한 주간을 신자로서 부끄러움 없이 경건하게 보내려고 노력한다.
십자가는 이 고난의 상징이자 구원의 빛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 말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교차점인 동시에 생명과 사망의 갈림길이다. 참혹한 처형장인 골고다 언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이 죄의 장막을 거두고 다시 한 번 얼굴을 비벼대는 제2의 에덴동산이 된다.
이 고난주간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성금요일에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며 예배하는 그 시간만큼은 한 해를 통틀어 가장 경건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첫사랑은 식어지고 기억은 우리를 배신하는 법이다. 평생에 한번 있는 고난주간이 아니라 설날처럼 매년 돌아오는 절기인지라, 보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지던 십자가가 무덤덤해지고, 뭘 그리 회개할 것이 많나 하며 자신도 모르게 기도 시간에 눈을 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부터인가 고난 주간의 예배에 영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영상들이 무뎌진 마음을 흔들어 재낀다. 그제야 딴 생각을 접고 화면 속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이제는 많은 교회들이 마치 예배의 고정된 순서가 된 것처럼 고난주간 영상을 보여 주기에 바쁘다. 때로는 목회자의 설교보다는 어떤 영상을 보여 주느냐가 예배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작년에 보지 않은 것, 더 새로운 것, 더 감성적인 것들로 채워진 그 무엇을 찾기에 바쁘다. 보여주는 영상의 충격이 강하면 강할수록 신자들은 더 크게 부르짖으며 기도한다.
문제는 이러한 영상들이 이제는 신자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의 감상자가 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보는 것은 빨리 이해하기 쉽지만, 너무 빨리 이해하는 것은, 그만큼 빨리 마음에서 사라진다.
영상은 영상일 뿐이다. 단 몇 분으로 편집된 영상으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의도된 감성에 의해 무차별적인 영적 무장해제를 당할 뿐이다.
이제는 영상을 보여주는 대신 오히려 설교를 더 오래 해야 한다. 이 때만큼 신자들이 마음을 열어 놓는 때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간 이것저것 걸려서 하지 못했던, 다 알지만 서로 묵인하며 넘어갔던 적나라한 죄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죄, 교회의 죄를 말해야 한다. 하나하나 정확하게 지적하고, 이야기 하고 또 이야기해야 한다. 영상은 몇 분이면 끝나지만 죄는 회개 없이는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어야 한다.
냉동 음식을 데우는 데 필요한 시간과 같은, 그 몇 분의 영상이 우리의 얼어붙은 영혼을 깨울 수 있을까? 이제는 영상의 도움 없이 그리스도를 만나자. 스크린을 바라보지 말고 스크린에 가려진 십자가를 좀 더 길게, 깊게 바라보자.
눈은 마음을 속인다. 마음을 쥐어짜고, 머리를 쥐어짜는 자기 성찰이 없는 한 진정한 회개는 없다. 회개 없는 고난은 그냥 통증일 뿐이다.
글ㅣ김종민 목사(애틀랜타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