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겪는 고통 가운데 육체적 질병의 고통, 삶의 질을 비교하는 고통, 영적 해산의 고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 육체적 질병의 고통은 누구나 다 겪는 고통입니다. 육체적 질병의 고통은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몸이 후패(朽敗)해지는 동안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에 그치지 않는 영적 해산의 고통으로 늘 마음이 눌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써는 누구나 생애 한번은 당연히 겪어야 하는 골육 친척, 형제들의 구원을 위한 고통일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질을 비교하는 고통은 얼마든지 자신이 예방할 수 있고, 미리 피할 수 있는 고통입니다. 비교하는 고통은 성숙하지 못한 인격이 스스로 자초하는 배설물(Rubbish) 고통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독일의 신학자요 실존주의 철학자, 루터교 목사인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1965)는 "비교의 고통이 있는 곳이 지옥(地獄)"이라고 했지요.
비교의 고통은 누가 크냐?하는 관심에서 비롯됩니다. 누가 큰 교회 담임하나? 누가 권력이 높은가? 누가 부자인가? 누가 어여쁜 미인인가? 네티즌들이 댓글을 다는게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것은 굉장히 중요한 관심사인 것 같으나, 쓰레기 배설물(Rubbish)과 같은 세속적인 관심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항상 누가 크냐? 하는 것입니다. 교만이라는 죄성을 내포한 성품이라는 것이지요.
소유와 지위, 힘의 논리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잠시잠깐 자신을 고품질인생(Quality People)으로 착각하고 성취감, 만족감을 느낄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종국(終局)에는 허탈과 자괴감, 무력감, 불안감, 우울증, 대인기피증으로 인한 염세주의에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정상에 올라가면 내려올 때가 있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지도자들이 뼈를 깎는 고통으로 자중자애(自重自愛)하고 삼가 조심해야 할 언행심사(言行心思)가 바로 누가 크냐? 하는 교만한 마음과 태도입니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힘과 크기의 논리로 도토리 키재기를 하다가 실패하고, 실수하고, 실족한 사람들을 우리는 너무 많이 보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 하고 다툴 때에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그들 가운데 세우신 후, "그러므로 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태 18:4),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가 9: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신대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섬기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서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육체적 질병의 고통도 가능한 할 수만 있다면 피하여야 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지도자들은 누가 크냐?하는 비교의 고통에서 반드시 치료되고 회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날마다 마음에 근심이 그치지 않는 영적 해산의 고통이 교회를 위해 있어야 할 것이고, 이러한 고통을 다같이 나누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