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시애틀 시학스가 '2014년 수퍼볼'에서 우승의 영예를 거머쥐었다. 구단창단이래 최초의 쾌거이다. 워싱턴주의 사람들은 그들이 어디에 살던 간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가 자기 일처럼 기뻐 어쩔 줄 모른다. 난 한국의 붉은 악마들만 난리법석을 떠는 줄 알았다. 풋볼경기에 대한 그 환호와 열기는 정말이지 이곳 미국에서 장난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과 기쁨을 다양하게 추구한다. 그중 하나가 인간의 자유의지가 선택하는 사회참여의 욕구일 것이다. 이민의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사회 문화적 참여가 별로 없다고 느끼는 많은 한인들은 우울하다. 이번 수퍼볼의 열기가 많은 이민자들에게는 남의 집 잔칫상을 기웃 거리는 심정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진정한 행복과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성경에서 찾아보자. 사람들은 종종 사람을 시험에 빠뜨려서 죄를 짓게 만든 것은 하나님의 계략이라며 원망과 분노에 사로잡혀 신을 외면하곤 한다. 애초에 그 전지전능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완벽하게 설계하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는 환경에서 살게 하지 않았을까하는 원망에 빠져 버린다. 그러면서 당장 나에게 유익하고 달콤할 것 같은 세상의 조건들을 외면하고 현실과 동 떨어진 하나님을 선택한 다는 것은 너무도 힘들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 어렵지 않게 간파하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똑같이 자기를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의 쾌락과 인본주의가 유혹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물리치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선택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사랑이지 않겠는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없이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완벽한 세상을 하나님은 싫어 하셨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 가운데에서 제 아무리 사탄의 유혹이 강력하게 다가와도 그것을 기꺼이 물리치고 하나님만을 향한 사랑을 실현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상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얼마 전 이석기에 대한 내란음모와 내란선동 및 국가보안범 위반혐의로 결심공판에서 검찰 측은 그에게 징역 20년을 구형했다. 최종판결까지 가보아야 알겠지만 지금 대한민국 요소요소에 뿌리 밖혀 있는 그의 하부조직들은 일단 기가 꺾일 전망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의 종북세력들이야 말로 진정한 김일성주의 추종자들이 아니겠는가?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존재하는 자유 민주주의를 선택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북한의 김씨 일가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그들이야 말로 자신들의 적극적인 염원을 바탕으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선택한 무서운 믿음이다.
사람의 믿음이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 인권과 자유를 빼앗긴 체 김일성일가만을 위한 충성을 강요당하는 북한인민들이야 말로 핫바지 사상인 것이다. 그들의 충성은 이미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지지 않은 억압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부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상대방을 향한 적극적이고도 진실한 사랑이 절실하다. 저 사람이 하는 것을 보아서 그것에 상응하는 사랑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미 사랑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사랑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떠한 대상만을 향한 맹목적인 염원과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중독의 악순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가족도 잃지않고 싶고 중독행위도 계속하고 싶은 열망이 존재한다. 하지만, 적당히 타협해서 두 가지를 다 잃지 않는다는 것은 다만 희망사항일 뿐이다.
중독에 대한 사랑을 계속해서 병행할 때 내 가족은 언젠가 정서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내 곁을 떠날 수밖에 없다라는 현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자신의 중독행위로 가족 전체가 힘든 삶을 짊어지고 나갈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과거에 비하면 조족지혈일 뿐이라고 합리화하며 중독의 고삐를 풀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전적으로 새 삶을 선택하지 못하는 절반의 인생일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지난날 내 과오와 지금의 내 모순을 다 내려놓고 전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때 비로소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