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교회 심관식 원로목사

이 세상에는 성공하는 사람도 많고 실패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에 기준을 돈 버는 데다 두어서 큰 기업을 가진 것으로, 부동산을 많이 가진 것으로, 큰 회사의 회장으로, 큰 상인으로 주머니마다 입금시킬 수표가 그득 찬 것으로 성공을 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고관의 자리를 가짐으로서, 유명한 언론인으로서, 지식 많은 학자로서, 인기 있는 연예인으로, 첨단을 걷는 과학자로서 성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상 말한 사람들이 성공했다고 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다 자기 위치와 자기 희망 속에서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성공은 사람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의 생애를 실패보다는 성공으로 마치려고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사람이 보기에 성공하는 것 같은데 주님은 실패로 보기도 하시고 분명히 실패인 것 같은데 성공이란 결론을 내리기도 하십니다. 세례 요한은 많은 선지자들이 행하는 이적 기사 한 번 하지 않았고 많은 군중에게 박수갈채 한 번 받지 못하였으나 성경 요한복음 10:40-42절은 세례 요한의 성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증거가 당장은 큰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허공을 치는 음향 같았으나 두고두고 그의 증언은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보시는 성공이었습니다.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 41절 상 반절에 말한 것을 보면 요한은 특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이로서 "오늘 같은 시대에 이적이 무슨 이적이냐" 고 부인하는 것은 불신앙이며 그렇다고 해서 "이적을 행해야 한다." 고 이적을 절대시하는 것 역시 비성서적입니다. 이적이란 때와 장소와 경우에 따라 하나님이 허락하시기도 하고 허락지 않으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적을 회피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갈구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적의 은사를 허락해 주시면 겸손히 이를 선용할 것이요, 그런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면 억지로 이를 바랄 것은 없습니다. 이적이 그리스도인으로 구원의 필수 조건은 아니며 그리스도인의 성패를 가늠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예나 이제나 이적을 갈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 당시에도 심지어는 주님을 갈망하는 것보다 더 이적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모두다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보기를 원하고 특출한 무엇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특출하고 유별난 것만을 바라거나 특출하게 되기를 원하다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요술쟁이 시몬이 되 버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시험을 할 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초인간적 힘을 과시하면 사람들이 "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린 사나이, 600만 불의 사나이 같은 이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쉽게 따를 것이라"는 제안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단호히 일축(一蹴)해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상하고 유명하게 살기보다는 옳고 바르게 사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별나게 살기만을 바라기 때문에 이상한 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옳고 바르게살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힘써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적을 행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태복음 16:14절에 그를 이적의 선지자 엘리야와 동격으로 대우하고 있습니다. 그는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여봐라는 듯이 이적은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키는 기적은 없었습니다. 엘리야같이 3년간 가뭄에 비를 오게 하는 이적은 행하지 않았습니다. 요단강을 가르는 기사는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태복음 11:14절에 그를 같은 위치로 놓고 보셨습니다. 그가 이적을 행할 만큼 특출한 능력은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순종하기에 주력한 하나님의 역군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유별나지기를 원하지 말고, 위대해지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소임에 최선을 다하여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명예욕과 허영심에 들뜨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이 어떤가를 시시때때로 반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은 참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을 다 참이라 하더라." 참이란 "사실"이란 말입니다. 과장은 없었습니다. 같은 사건이라도 호들갑을 떨고 과장을 하면 엉뚱한 일로 비약되기도 합니다. 사건을 과장하면 사실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몹쓸 사람으로 몰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좋지 못한 면으로 과장하여 십자가에 달게까지 하였습니다.

사람은 어떤 어려운 경지에 들어가도 사실을 사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소중합니다. 아첨하여 사실을 왜곡하는 사람, 불의 앞에 굴복하여 사실을 허위로 말하는 사람,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사실을 기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사실을 사실대로 하여 살았습니다. 비록 헤롯왕 앞에서 사실대로 지적하다가 그는 목이 달아날지라도 사실대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실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참이란 또한 "진실(眞實)"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실이란 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단어이지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그의 증언은 다 참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참 빛이며, 하나님의 어린양이며, 창조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그의 증언은 하나도 착오가 없고 조금도 과장이 없는 모두가 진실한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41절에"요한은 아무 표적을 행하지는 않았지만 요한이 예수를 가리켜 말한 증거는 다 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인 내가 반드시 이름난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지마는 반드시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는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증거를 천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진실치 못하면 예수님께 대한 참 증인이 될 수 없을 것이며, 만일 내가 예수님께 대한 참된 증거를 못하고 만다면 결국 내 인생은 실패를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특별하고 이름난 사람은 되도 안 되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람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참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인을 주님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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