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들은 디히트리히 본 훼퍼를 사랑한다. 본 훼퍼는 1906년에 태어나 1945에 히틀러에 의해 살해 된 독일 신학자이다. 그를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것은 그가 미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의 히틀러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 정신과,히틀러의 반유대정책에 반대함으로써 인종차별에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높이 사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미국 기독교인들이 그를 존경하는 것은 독일교회가 모두 히틀러를 지지했을 때에 오직 그만은 히틀러 우상화를 지적하며, 오직 교회는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흔들리지않는 주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오래전 에드먼(Edmond)에 있는 메이플장로교회(Maple Pres. Church)에서 디히트리히 본 훼퍼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 강사로 본 훼퍼의 전기작가인 에릭 메텍서스(Eric Metaxas)가 초대되었다. 약 이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왔고, 자석이 없어 교회 로비에도 의자를 놓고 사람들은 강의를 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그 곳에 참석한 동양인은 메이플교회의 신자인 김진숙목사님과 미국인 부인과 함께 온 어떤 한사람, 그리고 나 뿐 이었다. 모두 다 머리가 희긋히긋한 백인 노부부들 이었다. 그리고 특이히게도 가톨릭교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왔다. 그리고 대학에서도, 물론 사회단체에서도 강의를 경청하러 많은 사람들이 온 것을 보고 놀랐다. 한 사람의 독일 신학자에 대해 생각이상으로 많은 미국인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의를 듣고 난 후, 나 역시 개인적으로 본 훼퍼에 대해 관심이 많았기에 메텍서스의 책을 빌리러 린후드(Lynnwood)에 있는 도서관에 대출신청을 했다. 그러나 몇 달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받았다. 내가 67번째 대출신청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본 훼퍼는 19세기 말 독일의 가장 유명한 신학교인 베르린신학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27세에 이미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본 훼퍼의 논문은 소위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으로 쓰여진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 이었다. 당시 자유주의신학에 의해 단지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버린 교회에 대해, 진정한 성도로서의 믿음을 회복한 '거룩한 집단'만이 참 교회가 될 수 있음을 그는 외쳤다.
이후 본 훼퍼는 미국 뉴욕의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수가 되었고, 또한 맨하탄에 있는 이티오피아 이민자들의 교회에서 봉사했다. 그 때 그는 인종차별 문제와 노동계의 투쟁과 연관해서 사회의 정의 개념을 숙지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것이 후일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정책에 반대한 이유였고, 또 잘못된 지도자와 그를 우상시하는 독일교회에 대항해서 칼 바르트(Karl Barth)와 함께 소위 고백교회(The Confession Church)라고 하는 저항교회를 세우게 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는 독일 정보부 안의 반히틀러혁명에 가담하다가 발각이 나 체포되고, 마침내 전쟁종식 이틀 전에 사형을 당하게 된다.
본 훼퍼를 생각하며, 나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참다운 신앙적인 교제를 강조했던 그를 존경한다. 그리고 참다운 신앙을 소지한 존재라면 반드시 행동해야만 한다는 그의 논문(Action and Being)에 동의 한다. 물론 감옥에서의 신학적으로 체 정리되지 못한 그의 글들을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분명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었고, 또한 하나님을 사람하고 교회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미국인들은 존경하고 사랑한다. 모든 사람들이 오직 자신만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기이익에 충실할 때 이 사람 본 훼퍼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이웃을 생각하고, 정의와 진실이 무엇인지를 위해 희생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를 생각하며, 나는속으로 혼자 속삭여 본다. "언젠가, 우리 한국교회도 그를 기억하고, 그에 대한 강연을 듣고, 도서관으로부터 그에 대한 책을 빌리려 몇 달을 기다리는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