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에는 생명의 길이 제시되어 있다. 로마 가톨릭은 최근까지 라틴어로 된 성경만을 고집하고 기타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금지 했다. 또 평신도들에게는 성경 읽는 것이 금지되었고, 오직 성직자들만 읽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선교지에 가든지 그 지방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은 없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시작된 이승훈의 북경에서의 영세로부터 80년이 지나도록 쪽복음서 하나 번역하지 않았다. 교리서 등만 번역하여 가르쳤을 뿐 성경은 번역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신교는 처음부터 성경의 교회였다. 마르틴 루터가 교회 개혁을 시작한 16세기 초부터 "오직 성경만" (sola scripture) 절대적이라는 명제를 내 걸고 루터는 성경을 자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했고, 장로교회의 비조인 요한 캘빈 역시 그의 모국어인 불란서 말로 성경을 번역했다. 틴데일이나, 위클맆도 자기들의 모국어인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평신도들에게 읽게 했다.
한국에서의 성경번역 역사는 선교사들의 내한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한국말 성경이 만주에서 그리고 일본에서 먼저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그 사적은 다음에 기술하기로 하고, 오늘은 누가 최초로 성경을 전수 받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816년(조선조 순조 16년) 영국 군함 올체스트(Alceste) 호의 선장 맥스웰(M.Maxwell)과 라이라(Lyra) 호의 선장 홀(B.Hall)은 중국에 오는 영국 국왕의 사절 앰허스트(Sir J.W.Amhirst)를 천진(天津) 하구까지 호위하여 왔다. 이들은 한국의 서해안 일대를 탐사하고 해도(海圖)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당시 영국은 해양 대국으로 그 영향력을 온 세계에 뻗치고 있던 때여서 각지의 해도가 필요했다. 그들은 한국으로 항진하여 그 해 9월 서해안 군산만(群山灣) 마량진(馬梁津)에 정박하였다.
마량진 첨사(僉使) 조대복(趙大福)은 문정을 위해 승선하여 한문을 사용하여 필담(筆談)으로 이 배의 국적, 도래 목적, 한문 해독 여부 등을 물었으나 의사가 소통되지 않았다. 그는 선원들로부터 서적, 지구의(地球儀), 거울 등의 선물을 받고 돌아와 그들이 원하는 식량과 식수를 공급해 주었다. 조대복이 배 위에 올라갔을 때, 선장은 그에게 한문 성경을 한 권 기증 했다. 이 일이 한국인으로 맨 처음으로 성경을 손에 쥔 사건이다. 조대복은 한자 이름 그대로 '큰 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 4천년의 유구한 우리 역사에서 맨 처음으로 성경을 손에 쥔 사람이 된 것이다. 그가 그 성경을 어떻게 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순 한문으로 된 성경을 읽을 만한 실력이 못되었을 것이고, 읽지 않았다면 그 생명의 말씀에 접할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조대복이 성경을 어떻게 처분했을 가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먼저, 지금부터 약 200년 전, 이름 없는 서해안의 한 섬에 종이가 많았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종이로 만든 귀한 책을 받은 조대복은 우선 한 장씩 뜯어 흙벽을 도배하는데 쓰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아니면, 성경책이 얇은 종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풍년초(담배)를 말아 피우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만일 조대복이 이 한문 성경을 한 장씩 뜯어 풍년초를 말아 피웠다면, 담배 연기가 그의 폐 속으로 들어 갈 때, 성경이 탄 연기도 같이 빨려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의 말씀인 성경이 탄 연기가 조대복의 폐 속 깊이 들어갔을 것이고, 이는 앞으로 한민족이 거룩한 성경 말씀을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면 살아 갈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아무튼 조대복은 한국인으로 최초로 성경을 받은 사람으로 한국교회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바실 홀은 영국으로 귀국한 후, 「한국 서해안 및 류큐 열도의 항해기」(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he Great Loochoo Island)를 저술하여 1818년에 출판하였다. 이 책은 하멜이 쓴 항해기와 더불어 한국을 유럽에 소개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이 책에는 한국의 풍속화가 들어 있어 유럽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후에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한 캐나다 선교사 게일(J.Gale)이 쓴 글에 보면, 라이라 호의 선장 홀은 영국으로 귀환하는 도중 세인트 헬레나(St. Helena) 섬에 들러 그 섬에 유배되어 있던 나폴레옹(Napoleon)을 만났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조선의 사정을 얘기하고, 그가 스케치한 조선의 그림들을 보여 주었더니 흥미 있게 보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고 기록하였다.
한국에 주재(駐在)하는 선교사들이 내한하기 반세기 전에 선교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한국을 다녀갔던 선교사들이 몇 명 있다. 이들은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온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에 살면서 선교 사역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내한했던 사람들로 한국교회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람들이다.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목사는 프러시아계 독일인으로 의사였던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이다. 그는 1803년 7월 독일에서 유태계 독일인으로 태어났다. 그는 독일 경건주의운동의 발상지였던 할레(Halle)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일찍이 선교사가 될 결심을 하고 준비 하다, 1826년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동남아 자바(Java)의 바타비아(Batavia)에 1827년에 도착하였다. 그 후 그는 중국으로 떠나 1831년 요동반도를 거쳐 마카오에 이르게 되었다. 귀츨라프는 그가 마카오에 도착했던 1831년 6월, 중국 동해안과 만주를 거쳐 돌아오는 약 6개월에 이르는 전도 여행을 다녀왔다. 그는 이 여행에서 많은 성과를 올리고 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귀츨라프가 한국에 오게 된 것도 이 선교 여행에서의 성과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 동인도회사는 군함 로드 앰허스트(Lord Amherst)라는 1천 톤 급의 무역선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에 교역을 트기 위한 항해를 준비하였다. 이 때 이 배의 선장이었던 린제이(H.Lindsay)는 귀츨라프와 친분이 있었으므로 귀츨라프에게 통역, 선의(船醫), 선목(船牧)의 자격으로 승선해 달라고 요청 하였다. 귀츨라프는 이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임으로써 한국에 오는 첫 목사요 선교사로서 기록을 남겼다. 그가 한국에 와서 성경을 전한 일과, 주기도문을 번역한 일, 그리고 감자 씨를 주고 간 사적에 대해 다음에 상세히 기술하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