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에 대한 논문이나 이슬람권에 나가는 사람들을 위한 책자나 자료를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슬람의 용어가 통일되어 있지 않거나 표현의 내용이 정확하지 않아서 혼동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슬람 전문용어를 영어에서 한국어로 바로 번역하여 사용하다 보면 우리가 무슬림들이 생각하는 그 의미와 다르게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잘못된 용어 사용이 글 전체의 흐름을 바꿔놓기도 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한국어로 번역된 꾸란을 인용할 경우 그 번역의 잘못으로 인하여 선교신학자들의 글 내용이 전혀 다른 내용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랍어 원전에 대한 연구가 턱없이 부족한 우리 안의 상황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이고 더군다나 이슬람과 관련된 연구나 강의들이 이슬람의 본래 의도를 왜곡하고 있어서 편향된 교육과 훈련을 받고 나온 사역자들이 현장에서 새로이 공부해야 하는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렇다고 현장에 와서 이슬람을 길가에서 만난 무슬림이 아니라 이슬람 전공학자에게 이슬람학을 따로 배우는 사역자는 소수에 이르기 때문에 우리가 자꾸만 이슬람에 대한 이해에서 혼란이 오고 이것이 곧 사역의 맥을 흩으려 놓고 이런 혼란이 사역 전체를 잘못된 방향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1. 이슬람이란 무엇인가.
이슬람은 어원적 의미로 복종 혹은 순종이라는 말이다. 이슬람 종교를 따르는 사람을 무슬림이라고 한다. 무슬림이 되려는 사람은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메신저이다"를 암송하면 된다. 이슬람을 복종이라고 한 것은 이슬람이란 아랍어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이지 이슬람 신학적 개념이 아니다.
무슬림들은 어떤 어휘가 있으면 그 어휘의 사전적 의미와 이슬람 신학적 의미(혹은 이슬람 율법적 의미)를 따로 설명한다. 마치 일반적인 의미와 전문적인 의미를 따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이슬람을 '복종'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이고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내려준 종교'는 이슬람 신학적 의미이다. 그런데 '이슬람'을 복종이 아니라 '평화'라고 말하는 무슬림이 있다면 그는 수피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거나 이슬람의 본래 사전적 의미와 신학적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고 일부러 이슬람을 포장하려고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수피(마음의 수덕) 무슬림들에게 '이슬람은 평화'라고 한다. 다시 정리하면 일반적으로 이슬람의 사전적 의미는 '복종'이므로 '평화'라는 의미는 없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이슬람이란 단어에는 다음 2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개인적인 복종이라는 어휘적 의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종교의 이름이다. 꾸란 3:19에서 '알라와 함께하는 참 종교는 이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슬람이란 의미가 역사를 거치면서 달라졌다. 이븐 압바스는 타우히드(알라의 한 분 되심)를 표현하고 복종하는 것을 이슬람이라고 했다. 무까틸 이븐 술라이만은 인간이 알라에게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말하면서 유일하고 참된 종교, 이슬람은 알라가 한 분이라는 것을 단언하는 것이라고 했다. 알따바리는 한 층위에서 이슬람은 무슬림 그룹과 이 그룹의 이름에 합류하는 행위라고 했고 다른 층위에서는 이만(믿음)의 완전한 의미로서 개인의 마음이 더 심오하게 항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알자마크샤리는 영원부터 알라에게 받아들여질 인간의 반응 즉 참된 딘(종교)은 이슬람이라고 했다. 알라가 한 분 이심과 정의를 인정하고 그 하나됨과 정의를 도덕적으로 청렴한 삶으로 표현한다고 했다. 알라지는 알라와 함께한 딘이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셋으로 이해했다.
△ 복종하는 것이 무슬림이 된다 △ 온전함이나 평화적인 상태에 들어간다 △ 노예가 해야 할 일을 이행하여 알라에게 진지하게 헌신을 표현한다
알바이다위는 알라와 함께한 종교는 무함마드 커뮤니티를 반대하는 것들을 그만두어 무함마드에게 복종하고 알라가 한 분 이심과 무함마드가 가져다 준 법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다. 이븐 카시르는 알라와 함께한 종교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 기본적으로 알라의 한 분 되심을 인정하고 진지한 헌신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 부차적으로 무함마드 커뮤니티에 연루되어 알라가 전해준 규범으로 이해했다
라쉬드 리다는 이슬람을 복종(submission)이란 의미로 해석하고 알라의 존재와 명령에 개인적으로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했다. 알라의 계명과 그 계명에 반응하는 방법이 참 이슬람이라고 했다. 사이드 꾸뜹은 알라와 함께한 딘은 양심과 행위에서 마음의 항복이라고 설명하고 그 종교는 마지막 종교이며 사회 안의 개인들을 인도하고 보호하고 세우는 보편적인 법이라고 했다.
'알라와 함께한 종교'라는 말은 '알라가 한 분이다'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고 또 '무함마드에게 복종하고 그에게 내려준 법을 지키는 것'이란 의미가 들어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이란 어휘에는 두 가지 축이 있다.
(1) 굴복(surrender)의 내적 양상과 외적 양상 간의 관련성, 다시 말하면 내적 확신(tasdiq)으로서의 이슬람과 외적 순응으로서의 이슬람 간의 관련성이다.
(2) 이슬람의 개인과 그룹적인 측면이다.
꾸란 주석가들의 말을 정리하면 '내적으로는 개인의 알라에 대한 항복과 외적으로 무함마드 커뮤니티에 대한 순응이 결합된 것'을 이슬람이라고 했다. 사이드 꾸뜹은 이슬람을 제도(system)와 조직, 그리고 정치적 실체(entity)의 이름으로 사용했다. 이슬람 초기 꾸란 주석에서는 이슬람을 개인과 커뮤니티로 규정했으나 사이드 꾸뜹은 이슬람을 특별히 조직된(specific organized) 그룹에게만 속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사이드 꾸뜹에 의하여 이슬람에 대한 강조점이 개인의 항복에서 조직화된 그룹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슬람이란 정의를 이와 같이 시대별로 달라진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무슬림들 사이에서도 이슬람에 대한 정의에 따라 '이슬람과 무슬림'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두어야 한다. 이슬람은 한 분이신 알라에게 항복하고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내려준 법을 개인과 커뮤니티가 지키는 것을 말한다.
2. 이슬람과 무슬림에 이해와 선교신학적 관점
이 글의 제목이 '변화하는 이슬람과 무슬림의 말'이라고 한 것은 우리가 이슬람을 무슬림에게서 배워야 이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무슬림 중에서도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가야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모든 무슬림이라고 해서 이슬람을 잘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또 알아보아야 한다. 이집트에서 7월 3일 이슬람주의자 무함마드 무르씨가 축출되고 헌법재판소 소장 아들리 만수르가 과도기 임시 대통령으로 7월 4일 선서를 했다. 아랍 혁명 이후 이집트 국민들이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무슬림과 이슬람주의자 무슬림으로 나뉘었고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무슬림들은 이슬람주의자 무슬림들이 말하는 이슬람은 진짜 이슬람이 아니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무슬림들 사이에서도 이슬람에 대한 논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무슬림들끼리도 이슬람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의 무슬림들을 보고 "그들이 이슬람을 대표하는가"를 이슬람학자들에게 물어보면 학자들은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이슬람대로 살지 못한다"고 말한다. 또 우리들이 이슬람의 어떤 면을 보느냐에 따라, 그리고 무슬림들 중에서 그가 만나는 사람이 어느 부류에 속하느냐에 따라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그러나 이슬람학자들이나 꾸란 주석가들이 말하는 이슬람의 정의를 보면 우리가 무슬림 개인으로서의 이슬람과 무함마드를 믿는 커뮤니티로서의 이슬람을 둘 다 고려해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MB(Believer from Muslim Background, 기독교인이 된 무슬림)들에 대한 제자훈련에서 우리는 그들이 서로 굳게 결속하여 그들만의 커뮤니티가 생기도록 돕는 것(마치 한국에 들어온 베트남 사람들이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이룬 것처럼)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슬람이 본래 커뮤니티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이슬람의 정의를 통하여 알면 우리는 이슬람권 선교에서 개인뿐만 아니라 커뮤니티 전체를 대상으로 어떻게 사역할 지 좀 더 폭넓은 관점을 갖게 된다. 또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접근은 물론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하는 사역으로 사역이 넓어져서 그 중 하나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역도 확대될 수 있다.
이집트의 사이드 꾸뜹처럼 자신들이 특별히 조직한 그룹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을 무슬림이라 하지 않고 카피르(알라를 믿지 않는 자 혹은 알라와 무함마드의 교리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라고 하기 때문에 이슬람이 단순히 개인의 종교로서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종교로만 이슬람을 정의하면 결국 이슬람권 사역의 전체를 잘못 접근하게 되는데 그 중 "이슬람은 반대하고 무슬림을 보듬자"라는 말이라든가 "이슬람이 아니라 무슬림을 상대하자"는 말은 무슬림들에게 이상한 논리가 되는 것이다. 혹자는 위와 같은 관점은 하나님의 선교가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런 논리 때문에 이슬람의 전체 숲을 자꾸만 놓쳐서 더 나은 접근을 우리의 논리로 막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슬람은 개인의 내적 확신으로서의 이슬람과 커뮤니티의 외적 순응으로서의 이슬람 둘 다를 고려해야 이슬람권 사역을 제대로 할 수 있다. 개인으로서의 무슬림에게는 영적 구원이 강조되고 커뮤니티로서의 이슬람은 우리가 그들의 사회적인 필요에 관심을 둘 수 있다. 이런 사역의 방향이 나온 것은 이슬람에 대한 의미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연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슬람은 기독교와 전혀 다른 종교이기 때문에 중동에서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들로부터 소수 종교로서 차별을 받아왔고 냉대를 받아온 것을 알면 우리가 이슬람을 접근할 때 이슬람에 대한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연구 없이 함부로 이슬람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이해에서 좀 더 우리의 말을 낮추고 귀를 더 열어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이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뭔지를 묵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나가는 말
그렇다면 우리는 이슬람에 대한 견해가 우리 안에서 달라지는 원인을 살펴보고 이렇게 달라진 견해 때문에 사역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더군다나 무슬림 사이에서도 이슬람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이슬람은 시대를 거치면서 그 의미 또한 변화를 겪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이슬람을 보아야 하는가? 첫째, 기독교인은 다른 종교에도 일반 은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를 확대하여 이슬람을 기독교의 이단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이슬람은 기독교와 전혀 다른 종교라는 인식이 먼저 있어야 한다.
둘째, 이슬람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달라지는 원인들 중에는 우리가 이슬람에 대한 무슬림의 말을 더 많이 들어보지 않아서 그럴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학술적인 연구에 시간을 쏟아야 한다. 이슬람을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그리고 무슬림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하는지 서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는 학자에게 배울 필요가 있는데 결국 이슬람을 학부와 대학원에서 전공한 사역자들이 좀 더 많아져야 우리가 이슬람에 대한 좀 더 건강한 이해를 할 수 있다.
셋째, 이슬람권에 나가는 사역자들이 무슬림에 대한 선교신학을 배워야 한다. 넷째, 이슬람에 대하여 한 두 차례 세미나를 통하여, 혹은 몇 개월 공부했다고 이슬람을 다 아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되고 이슬람 지역에 나간 사역자들이 매년 콜로키움(연구하는 모임)을 지역별로 만들어 전문가를 초빙하여 한 주제를 가지고 1주일 이상 충분하게 공부하는 시스템을 만들어가야 한다. 특히 기독교인들이 만든 기관에서도 훈련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가 무슬림의 말을 들어보아야 무슬림들이 이해하는 이슬람을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다섯째, 이슬람이 7~9세기에 다 확정되었기 때문에 고전적인 이슬람을 강조한다기보다는 이슬람이 시대별로 어떤 특징을 보여주었는지를 알아서 오늘의 이슬람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또 무슬림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 그들이 갖는 지식이 각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변화하는 이슬람 속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는 현장에서 우리가 복음으로 살아가기를 요구 받고 있다.
공요셉 박사(중동아프리카연구소 소장)
제공: 한국선교 KM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