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의 말씀 : 창 11:1-9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2. 시작 기도
아버지! 제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시나이다(느 9:33).
저는 악을 행하였으나 주께서는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평생을 나의 이름을 내기 위해 탑을 쌓아온 자입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사 모든 것을 바라보시던 주께서 나를 심판하셨습니다.
누구라도 저지할 수 없는 자기주장 의지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오늘도 티끌과 공의의 심판을 아멘으로 받습니다.
나의 이름을 멸하시고 나의 자랑을 폐하소서.
나로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이아침, 당신의 인자한 말씀을 듣겠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3. 본문 주해
홍수심판 이후 노아의 후손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각 족속으로 나뉘어졌다(10:32).
각자의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나뉘어 땅에 머물렀다(10:5, 20, 31).
이들은 각기 다른 언어를 가지고 이미 나뉘어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온 땅이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창세기 11장의 서두는 10장과 모순된다.
이로 보건대 '창 11:1-9'의 바벨탑 이야기는 개별전승 자료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 신학적 기능은 원시역사(1-11장)의 결말을 보여주는 데 있다.
또한 그 핵심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려는 인간의 의도(4절)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에 있다(6-7절).
때는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일 때이었다(1절).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어휘도 같았다"(원역)
사람들이 동방으로 가려다 시날 평지에 머물게 되었다(2절).
그들은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여 성읍과 탑을 건설한다(3절).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자기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고자 한다(4절).
이에 하나님이 사람들이 건설하는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신다(5절).
무소부재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성읍과 탑의 건설을 모르실리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려고 내려오셨다'는 말씀은 그들을 완곡한 풍자기법이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 웃으신다. 내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시 2:4).
하나님은 한 족속과 한 언어를 가진 이들이 벌이는 일을 막을 수 없다고 하신다.
인간의 자기주장 의지는 하늘에 닿고 하나님 같이 되려는 소원과 열정을 지닌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처는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시고 언어를 혼잡케 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버리시니 그들이 도시 건설을 중단한다(8절).
여호와께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으니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바벨'은 통상적으로 '휘젓다, 혼합하다, 혼잡한 무리'로 번역되어 왔다.
하지만 그 어원적 의미는 '하나님의 문'이다(폰 라드, 창세기 주석).
사람이 스스로 안전을 꾀하고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다 심판받은 자리는 바벨, 곧 '하나님의 문'인 것이다.
바벨탑 사건으로 세상은 소통부재의 혼란과 흩어짐의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구원의 '문'을 여신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선택과 소명이며, 하나님은 그를 통해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복을 주신다.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한다. 비록 죄 가운데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인간의 역사에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교차한다.
하나님은 아담과 가인을 심판하시되 은총을 베푸셨다.
노아 시대 자기 인생을 사는데 몰두한 이들을 심판하셨으나 노아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펼쳐나가신다.
홍수심판이 임했으나 각 족속은 생육하고 번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범죄는 계속된다.
이번에는 자기주장 의지로 자기를 보호하고 자신의 명성을 얻으려는 반역을 꾀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존재물들을 통해 자기만의 성읍과 탑을 건설한다.
스스로 안전을 구하고 자기 이름을 세상에 드러낸다.
인간의 실존은 '돕는 자'(에쩰)를 필요로 한다.
그 돕는 자는 오직 야곱의 하나님, 곧 언약의 하나님이시다(시 146:5).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번성의 축복을 하나님을 등진 채 자기 안전과 자기 명성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존재물로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한다.
거기에 존재물을 주신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는 찾아볼 수 없다.
도리어 자기 이름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한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다 보고 계신다. 하늘 보좌에서 비웃고 계신다.
하나님은 새로운 구원의 문을 여셨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되 모든 민족이 그를 통해 구원받는 복을 주셨다(창 12:3).
이 복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성취하셨다.
그것은 아들을 믿는 자마다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영생은 하나님과의 사귐이며, 그것은 '에쩰'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는 것이다.
거기에 인간의 이름은 멸하고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만 드러난다.
시편 기자는 성읍과 탑을 건설하는 이들을 향해 경고하며 아들과 입맞추라고 증거한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 2:8-11).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죄사함과 세례를 통해 아들과 입 맞추는 은혜가 임했다.
그 때 혼잡한 언어는 하나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언어로 구원의 말씀, 영생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진리의 영이 생명의 말씀을 증거한 것이다.
이에 각 곳에 흩어진 백성들은 아들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 영생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행 2:8).
생명의 말씀이 들리는 곳에 흩어진 민족이 하나가 된다.
영생의 말씀 안에서 언어는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하늘에 속한 증거, 만물 위에 속한 증거이다(요 3:31).
하지만 성령의 증거가 임하기까지 이 말씀은 들리지 않는다.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요 3:32).
많은 무리들이 영생의 말씀을 듣고도 어렵다고 탓하면서 떠나간다(요 6:63).
그들은 여전히 언어가 혼잡하고 흩어진 무리들 가운데 거한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그치지 않는다.
이는 아들의 죽음으로 이미 구원의 문, 하나님의 문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최근 신약학자 오성종 교수님으로부터 바울의 교회관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되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으나 그에게 교회는 '하나'였다는 것이다.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행 18:22).
여기서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칭한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오직 하나의 교회를 칭한다.
그것은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이다.
시간과 공간을 떠나 모든 교회는 하나의 교회인 것이다.
교회가 영생의 말씀으로 세워지고 영생의 공동체가 될 때 언어도 하나요, 민족도 하나가 된다.
생명의 말씀도 하나요, 하나님의 백성도 하나인 것이다.
현재 '지방교회'로 불리는 이들은 개교회주의를 반대하였다.
이들은 초대교회처럼 특정한 지방의 이름으로 교회를 명명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기존의 모든 교회와 단절하며 심지어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것은 교회가 하나라는 진정한 의미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외형적으로 하나의 교회이다.
하지만 그곳에 영생의 말씀이 역사하는지, 진정한 영생의 공동체가 실현되는지는 의문이다.
영생의 말씀으로 사는 성도는 그가 어디에 속하든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의 민족이 되는 것이다.
4. 나의 묵상
나는 평생 나를 위하여 성읍을 쌓고 탑을 쌓아왔다.
내 인생, 내 이름, 내 명성을 얻고자 고군분투하며 살아왔다.
세속의 세계에서도 그러하였고 성속의 세계인 교회에서도 그러하였다.
하나의 교회, 하나의 공동체는 관념에 불과하였다.
어찌하면 내 교회, 내 성읍, 내 나라를 구축할까를 관심하였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지켜보셨다. 하늘 보좌에서 비웃으셨다.
마침내 공의의 심판이 내게 임하였다.
내가 쌓은 성읍이 황폐하게 되었고 내가 쌓은 탑이 무너졌다.
내 이름은 자랑과 긍지의 대상에서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이 수치가 되었다.
하나님은 철장으로 나를 깨뜨리시고 질그릇 같은 나를 부숴버리셨다.
광야로 쫓겨나 방황하는 자가 되었다. 그런데 아침마다 말씀으로 찾아오셨다.
나는 생명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떨며 즐거워하였다.
아들의 죽음과 무덤에 연합되어 아들과 입맞춤하는 자가 되었다.
스스로 안정을 구하고 명성을 쌓다가 망한 자, 여호와께 피하는 복된 자가 되었다(시 2:12).
내 이름으로 살지 아니하고 오직 아들 안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산다.
내 이름을 위한, 우리 선교회를 위한 어떤 시도도 그친다.
하나님의 이름만이 드러나며 하나님의 나라만이 임하기를 구한다.
이를 위해 혼잡한 인간의 말이 아닌 생명의 말씀을 전한다.
그것을 통해 흩어진 영혼들을 하나로 모은다.
그들이 영생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생의 삶을 살기를 구한다.
온 땅의 언어는 생명의 말씀으로 하나가 되었고, 흩어진 민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가 되었다.
교회는 오직 하나이다!
5. 묵상 기도
아버지여...
혼잡한 언어로 흩어진 민족으로 살았습니다.
말은 하지만 소통할 수 없는 비극 속에서 살았습니다.
어찌 인간의 말로 소통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주장 의지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스스로 안전을 구하며 내 이름을 내고자 열심을 다했습니다.
오, 아버지여!
하늘에서 비웃으시는 아버지여!
내가 멸망 받았나이다. 공의의 심판이 임했나이다.
내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십니다.
심히 큰 악을 행하였으나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광야에 버려진 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아들의 죽음과 무덤에 거하게 하시고 아들에게 입 맞추게 하셨습니다.
안전할 수 없는 자, 나의 피난처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
나의 이름은 멸하소서. 나의 자랑을 멸하소서.
당신의 이름만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의 영광만 드러나게 하소서.
내 이름을 내려는 어떤 시도도 그치나이다.
하나님이 비웃으시는 자가 아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영생의 말씀을 전하오니 성령으로 증거하소서. 혼잡한 언어가 하나 되게 하소서.
곳곳마다 영생의 공동체가 세워지게 하소서. 교회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곧 만물 위에 아버지이십니다.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일하시고 만물 가운데 계시나이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서형섭 목사는...
서 목사는 하나님의 검증을 마친 영적지도자다. 한국외대에서 경영학(B.A.)와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MBA)를 졸업하고, 서울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M. Div.)을 공부했다. 논문 '말씀묵상을 통한 영적 훈련'(Spriritual Training through Meditiatioin on the Word)으로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 Min.)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 2000년 반석교회를 개척하고, 치유상담연구원에서 6년간 수학 후 겸임교수를 지내며 동시에 한국제자훈련원에서 8년간 사역총무를 역임했다.
현재 서형섭 목사는 말씀묵상선교회 대표로 섬기며 특히 '복음과 생명', '말씀묵상과 기독교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저술과 세미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말씀묵상이란 무엇인가>(갈릴리, 2011년)와 최근 출간된 <복음에서 생명으로>(이레서원, 2013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