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리 하얀 지붕에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지
하얗다 못해 눈이 부셔서
눈 감고 모퉁이를 돌아서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모랫길을 밟아 저 하얀 지붕 모양 새,
하이얀 이상한 지붕, 항아리 뚜껑 닮게,
귀한 보화 사해사본 건져내온 항아리를 묘사(描寫)함을
건물 현관 안, 성큼 들어서고 나서야, 알아차린 허허, 自失 감
벽에 몇 천 년 묵은 파피루스 글씨 하나하나 어느 손길의 마음이었을 가
깊은 중심부 한 중간엔 둥그런 시멘트 석 철 기둥이 둘레로 서넛 아름 양피지 글줄 다듬어 담아 타임머쉰
또 앞으로 마지막 날에, 천여 년 흘러도 다치지 않을 돌기둥을 앉혀서 기적의 시편들을 가다듬었네.
신비(神秘)의 손 자죽 남아서 어리둥절케 되돌려진 역사 흘러 흘러 작음아 한 이 마음 안에도 담아져서 숨도 동작도 순간으로 멈춰진 짧은 時間 그 연속이 저려 와서 呼吸마져 생각 속으로 잠겨 영원한 내일에 이어져 가누나
성(聖)스러운 문화여.
신비하고 기이한 건축물에 화사한 햇빛이 쏟아져 내려, 밝고 새하얀 바닥모래와 새하얀 지붕의 곡선이 함께 어울려 합쳐져서 마음속까지 파고 내려앉는, 깊게 그리고 맑게 만들어 놓아 주는 한 낮의 신비의 순간, 시간이었습니다. 눈이 부셨습니다. 유리문 현관을 그래 눈 비비며 들어서자, 벽 유리 길게 길게 진열장 옆으로 사해사본 편린(片鱗)이 즐비히 유리 장(藏)안 안으로 전시되어진, 그리고 홀 방안으로 육중하게 역사적 축적(蓄積)으로 깔아 앉는 느낌의 황금빛 방안이 둘러져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땅 속 깊게 패여 박힌 글들을 파내어서 되찾아 건져 낸 사해사본 편린이었습니다.
그 누가 언제 필사본으로 정성되히 적어 찍어 놓았는지, 언제 이토록 정자필로 필사 해 놓았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목동 베두인 한 소년에 의하여, 혼자 양 무리 떼에서 떨어져 나간 양을 찾아 건져 내려고, 둔덕 아래로 내려갔다가 미끄러지면서, 거기 땅 굴에 발이 빠져서, 찾아낸 웅덩이 이것이, 약 이천 년 동안 땅 속에 파묻혀, 얼마정도는 부식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의 필사본이었습니다. 몇 년 후에는 대 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라앉을, 타이터스 장군이 AD.70년에 로마 東征의 打擊 地域으로 목적 된, 예루살렘 도성을 완전 포위하여 3개월 간 철통같이 가두어 놓은 상태에서 그래도 그 철통 망을 어떻게 해서든 뚫고 도망 쳐 나오는 구멍을 찾아내어서, 이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유대인 열심당원 수도사들의 필사본을 담아 둔 항아리들을 품으로 안고 마싸다 사해 앞까지 도망 쳐서 내려 온 이들 필사본, 결국엔 더 도망 칠 곳이 사막에 의해서 막혀버린 사해 끝자락에서, 언덕 둔덕에 하는 수 없이 묻어 놓은 성경 두루마리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까지 거의 2천년동안 가까이, 아무도 모르게 땅 속에 묻혀서, 글씨로서의 생명처럼 숨을 쉬고 있었던 성경 필사본이었습니다. 이 사건이야 말로 세상에서 풀어 낼 수 없는 신비로서의 수수께끼처럼 감추어져 있었던 생생한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귀한 보화 필사본을 다시는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성서학자들에 의해서, 요즘 말하는 타임머쉰 처럼, 웬만한 폭탄이 떨어져서도 파손되지 않도록, 강한 철 콘크리트로 둥글게, 그리고 쇳덩어리 철 印章 모양으로 뭉겨 다져 묶어 감춰 놓은 성서 두루마리입니다. 어쩌면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 세상 끝날 깨서야 다시 열어 펼쳐 볼 그런 보관소 항아리 모양 건물입니다. 바로 이런 귀중한 장소에 이런 역사를 아는 순례자들이 찾아 와 그 깊은 의미를 감동 받는 현장으로 찾게 되었다는 감격이, 그 이후에도 달 반쯤을 나의 몸 안에서 생생하게 지워지지가 않았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당시의 열심당원들 수도사들이 자기 생명보다도 더 귀하게 여겼던 그 감격의 必死的인 보호 열정이, 지금 여기 감동을 가누지 못하는 순례자들 가슴 속에도, 또 그처럼 심장이 뛰고 있으리라고, 내 속 마음과 함께 다짐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救世主 <그리스도의 말씀>은 지구가 깨어져 나가는 한이 있어도, 아니, 성서적으로 그런 날이 반드시 찾아오긴 올 것이겠지만, 지금 우리 앞에 살아있는 <생명적 말씀>임을 소리 처서, 또 소리쳐 내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