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환 시인의 시 "산을 오르며"의 내용 가운데 "산을 오르기 전에 공연한 자신감으로 들뜨지 않고 오르막길에서 가파른 숨 몰아쉬다 주저 앉지 않고 내리막길에서 자만의 잰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평탄한 길에서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잠시 무거운 다리를 그루터기에 걸치고 쉴때마다 계획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서는 걸어온 길 뒤돌아보며"라는 산의 특성을 그려 놓은 것을 보면 산(山)은 참으로 인생의 삶과 같은 것이다는 생각을 한다. 이 중에서도 필자가 요즘 가장 많이 생각하고 머리속에 늘 떠올리는 것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그루터기'이다.
그 이유는 강아지를 아침 저녁으로 오줌과 똥을 뉘게 하기 위해서 강아지가 가장 편하게 여기고 필자 또한 계절의 변화를 맛볼 수 있는 사철나무, 소나무, 철쭉 꽃나무와 포플라 나무들이 있는 집 주변의 가까운 정원에 가는데 매일 같이 몸통이 잘려 나간 포플라 나무의 그루터기를 보기 때문이다. 포플라 나무는 어릴때 한국 시골에서 살았던 필자의 기억으로 도로가에 키가 큰 모습으로 서 있으면서 여름철에 장마가 지나고 난후에 한 동안 비가 내리지 아니하면 차들이 포장이 않되어 있고 간헐적으로 움푹 패인 곳을 먼지를 일으며 한 차례 달리고 나면 포플라 나무의 잎들에 먼지가 하얗게 자리잡고 있는 신작로를 생각하게 하는 나무이다. 그래서 포플라 나무를 아침 저녁으로 볼때 마다 그 옛날 어린 시절이 회상이 되어서 좋은데 그 반면에 포플라 나무의 그루터기를 보면 볼수록 그 모습이 참으로 처량하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없는 정원을 가장 빠른 속도로 녹음을 만들기 위해 보통 사람들은 포플라 나무를 심는다. 그러나 수년이 지나면 포플라 나무의 몸통이 커지고 키가 자라 매년 마다 봄에는 기름져 보이는 햇가지를 나무 가지들에서 뿜어내며 여름에는 왕성한 푸르름을 보이다가 소리 없이 찾아오는 가을 바람에 자신이 입은 옷 색깔을 노란색으로 물들이고 차가운 겨울이 오면 자신의 때를 알고 노란색이 어느덧 갈색으로 변하고 동시에 사나운 바람결에 자신들을 내려놓고 겸손히 땅에 하나 둘씩 떨어져 소리 없이 땅의 흙과 어우려져 사라지는데 그 모습이 보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지저분하게 보여질 뿐 아니라 정원에서 낙엽을 쓸어담는 정원사들에게는 큰 일거리이다. 그래서 간혹 포플라 나무가 너무나 크면 주인의 요구에 의해 정원사가 나무의 몸통을 잘라내고 그 주변에 다른 나무들을 심고 뿌리가 너무나 깊이 밖힌 그루터기는 어쩔 수 없어 그냥 그루터기 채로 내버려 둔다.
몸 통이 잘려 나간 포플라 나무의 그루터기를 지난 몇 개월 동안 유심히 살펴보면서 여러가지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그루터기는 시간이 지나도 절대로 위로 솟아 날 수 없다는 것이며 그루터기를 둘러싼 나뭇잎들이 철을 모르고 햇가지를 낼뿐 아니라 흙의 표면에 드러나는 뿌리들 위로 수도 없는 포플라 나무의 가지들이 여기 저기에서 솟아 올라 온다. 그것을 보면서 그루터기는 생명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이며 자신의 생명력을 어떻게 라도 나타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저기에서 솟아 오르는 어린 포플라 나무 가지는 충분한 수분을 공급받지 못하기에 한 여름에 햇살만 한번 뜨거우면 생명력을 가진 푸르른 모습이 어느새 갈색으로 바뀌어 시들어 고개를 숙이면 그 모습이 너무나 지저분해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뽑는다.
그루터기 나무와 온전한 모습을 한 나무들을 비교해보면 그루터기가 아닌 나무들의 주변에는 자신의 모습과 동일한 어린 나무들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없는데 유독 포플라나무 그루터기 주변은 자신과 닮은 동일한 모습을 한 어린 나무가지들이 많이 솟아나 자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해보는데 그것은 몸통이 잘려나간 그루터기는 살아 있다 할지라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기에 몸부림 치고 있으며 수많은 어린 나무가지들을 뿜어내지만 그것들이 살아 갈 수 있는 확률이 적을 뿐 아니라 어린 나무가 그 주변에서 자라 장성한 나무가 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세월이 걸리겠다는 안타까움이다. 아마도 그루터기는 어린 나무가지들을 위해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그냥 그들이 잘 자라도록 보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부모도 커가는 자녀들에게 뭔가 도와 주고 싶어도 아무것도 도와 줄 수 없어 그냥 보고만 있는 그루터기처럼 살아간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그리고 마음이 안타까워 눈물만 하염없이 흘릴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그루터기의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자연속에서 잠시 쉬고 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의자라는 것 이외 도무지 미래를 찾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흉하게 남은 몰골로 설상풍우(雪霜風雨)에도 아무런 반응없이 살아가야 하기에 안쓰럽다. 그러나 그루터기는 부정적인 요소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그루터기는 죽은 것 같지만 살아있는 것이며 조금은 시간이 걸린다 할지라도 자신의 견실한 뿌리를 통해 언젠가는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성경은 절망과 좌절감으로 삶에 두려움을 가진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희망을 가지도록 그루터기를 비유하여 설명하는 것을 볼 수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환상속에서 한 스랍이 가지고 온 제단 숯불로 입술의 정함을 받은 후 하나님으로 부터 소명을 받고 남 유다 백성의 완악함에 대해 책망하고 남 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절될때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이와 반면에 거룩한 씨인 그루터기는 남겨질 것이라는 희망의 메세지 또한 선포하는 내용이 이사야16:13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 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이말은 이스라엘 민족들의 신실한자들에 대한 보존의 약속으로 그들을 통하여 남은 구속사를 단절없이 진행시켜 나가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이며 이것의 최절정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시어 성육신(成肉身)하게 하신 것이다.
이말은 죄된 인간이 절대 거룩하시고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 오셔서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인간에게 거룩한 씨로 그루터기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사랑을 통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 한명 한명을 교회를 세우는 그루터기로 삼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루터기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믿음의 뿌리를 내리면 가정, 이웃과 민족이 살고 복을 받게 되며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행복하고 안전하게 살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