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 국민동의청원 제도가 여야 간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최근 심사 요건을 충족해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된 청원의 상당수가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어, 국민의 목소리를 입법 과정에 반영하고 고충을 해소하겠다는 제도의 본래 취지가 퇴색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23일 국회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에 따르면, 최근 동의 5만 명을 받아 심사 대상이 된 청원들 중 다수가 정쟁 성격의 내용을 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정당해산심판청구 촉구 결의안', '정청래 법사위원장 해임 요청', '신원식 국방부 장관 탄핵소추안 즉각 발의 요청',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발의 반대' 등의 청원이 대표적이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 대통령 탄핵 요청 청원'에 따른 청문회 개최를 강행하면서, 여권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맞불 성격의 정치적 청원이 잇따르고 있다. 이로 인해 국민동의청원 제도가 여야의 대리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국회는 2020년 온라인 국민 청원인 국민동의청원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러나 22대 국회에서 170석 이상을 차지한 민주당이 다수당의 힘을 앞세워 국민 청원을 선택적으로 적용하면서, 제도가 정쟁의 도구로 변질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의 중심에는 민주당 초강경파인 정청래 의원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법제사법위원회가 있다. 정 위원장은 사실상 형식화됐던 청문회를 부활시키며,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민 청원을 통한 대통령 탄핵 청문회를 개최했다. 지난 19일 채상병 순직 사건 관련 대통령실 외압 의혹을 다룬 데 이어, 26일 예정된 2차 청문회에서는 김건희 여사 관련 주가조작 및 명품가방 수수 의혹을 집중적으로 다룰 계획이다.
반면, 민주당은 이재명 전 대표 연루 사건을 수사했던 검사들에 대한 탄핵안은 즉시 본회의에서 처리하지 않고 법사위로 넘겼다. 이 역시 청문회를 통해 여론전을 펼치겠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정청래 위원장은 윤 대통령 탄핵 반대 청원에 대한 청문회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국민 청원을 오남용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법사위에서 하는 청문회는 청원심사로, 하필이면 청원의 내용이 대통령 탄핵 즉각 발의 요청이기에 중요한 안건이라 국회법 제65조 1항에 의거해 청문회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정쟁용 청원이 늘어나면서 정작 필요한 '민원 청원'은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 법사위는 '교제 폭력 관련 제도 개선 요청'이나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 처벌과 가해자 신상공개' 등의 청원도 받았지만, 이들 청원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국회 관계자는 "국민 청원이 여야 지지자들의 세 대결처럼 변하며 증오의 정치를 부추기고 있다"며 "정치 공세 수단으로 악용되지 않고 본래 취지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 법사위 위원은 "민주당 위원들 사이에서도 국민 청원을 앞세워 정쟁용 청문회를 여는 데 우려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 강경한 기류"라며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정작 중요한 법안에 대해서는 심사를 충분히 하기 어렵다. 청문회 준비에 모든 시간을 다 쓰게 생겼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결과적으로 국민동의청원 제도가 정쟁의 장으로 변질되면서 제도의 본래 취지가 훼손되고 있다는 비판이 높아지고 있다. 앞으로 이 제도가 본래의 목적대로 국민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고 고충을 해소하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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