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우남이 배재에서 받은 영향과 활동
배재학당은 우남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입학 당시만 해도 우남은 유교사상에 충실한 전근대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배재학당은 우남에게 영어와 서양의 근대 문명으로 무장한 근대적인 인물로 변하게 하였던 것이다. 우남이 배재학당에 입학한 기본적인 동기는 신앙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우남이 영어를 배운지 6개월 만에 배재학당의 영어 보조교사(Tutor)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하나는 영어를 공부하되 한문을 배우듯이 모두 암기하는 학습법을 사용한 탓이요, 다른 하나는 제중원이라는 신식병원에서 근무하던 미국인 여의사 파이팅의 한국어 교사로 뽑혀 수업료를 받으며 그녀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는 대신 그녀로부터 직접 영어회화를 배운 것 때문이었다. 이 때 우남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천재라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우남이 배재학당에서 배운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영어가 아니라 새로운 민주적 사상, 혁명적 사상이었다. 그는 개신교 선교사들과 서재필의 가르침 아래서 자유(自由), 평등(平等), 민권(民權) 등 근대적 정치이념을 깨우치고 미국식 민주주의 제도를 신봉하게 되었다. 특히 서재필을 존경하고 따르게 된 그는 서재필의 지도하에 배재학당 내에 ‘협셩회’라는 토론회를 조직하여 활발한 토론 활동을 폄과 동시에 ‘협셩회 회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그 ‘저술인’으로서 논설을 썼다. 우남은 서재필의 영향 아래에 창립된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에 참여, 만민공동회회 총대의원으로 맹활약을 하였다. 배재학당은 한학자나 관료로 일생을 끝마칠 뻔 했던 우남을 서구지향의 근대적 개혁가-혁명아로 개조시켜 놓은 용광로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남의 이러한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우남은 1899년 1월에 대한제국 당국에 의하여 체포되어 1904년 8월까지 만 5년 7개월간 서울의 종로 선린동에 있었던 한성감옥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그가 투옥된 이유는 「매일신문」과 「제국신문」등 자신이 직접 창간에 간여한 언론매체를 통해서 고종 황제의 보수 정권을 신랄히 비판함과 동시에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의 총대 위원으로서 극렬히 반정부 데모를 주도하였기 때문이었다.
신긍유의 권유에 의해서 마지못해, 또 천주학(天主學)쟁이가 되는 것을 싫어하신 어머니의 눈을 피해 남모르게 시작한 배재학당이었지만 우남에게 있어서 배재학당은 그의 사상의 전환점(Turning Point)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배재학당을 다니는 동안 어머니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아직 기독교 사상을 받아들이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신학문을 배우고 민주주의를 배운 배재학당에서 우남은 대한민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기 위한 새로운 인생의 준비를 이미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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