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아이들이 어릴 때가 좋았던 것 같다. 그저 바라만 봐도 행복했으니까. 하는 짓이 신기했으니까. 그래서 착각하며 살았다. "우리 아이가 최고야!"

화창한 어느 봄날, 동물학교에서 소풍을 가게 되었다. 토끼 엄마가 도시락을 싸 들고 학교에 도착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다람쥐 엄마였다. 다람쥐 엄마가 급한 사정이 생겼다. 그래서 토끼 엄마에게 부탁했다. "어머, 죄송한데, 우리 집 애한테 도시락을 좀 전해주세요."

토끼 엄마는 물었다. "댁의 아이를 어떻게 찾습니까?"

그러자 다람쥐 엄마가 대답했다. "저희 집 애는 찾기 쉬워요. 학교에서 가장 잘 생긴 아이를 찾으면 됩니다."

오후가 되었다. 토끼 엄마가 다람쥐 엄마에게 도시락을 도로 돌려주었다. "왜 우리 아이에게 도시락을 전해주지 않았어요?"

"아무리 둘러봐도 댁의 아이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아이보다 잘 생긴 아이가 없더라구요."

자식이 어릴 때는 자기 자식이 천재인 것 같고, 최고인 것 같다. 부모 마음은 다 똑같다. 하는 짓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얼마나 귀여운지. 남들보다 다른 것 같아서 착각한다. "얘는 남들과 뭔가 달라." 그래서 이런저런 기대를 해 본다. 부모 욕심이지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기대감도 무너진다. 점점 실망한다. 속상해진다. 나중에는 원수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꼴도 보기 싫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는가? 그래서 더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으니까. 시대 조류야 어떻든 간에 성경은 말한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시 127:3-4)"

자식은 여호와로부터 온 상속이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상급이요 보상이다. 장수의 화살통에 들어 있는 화살이 그의 명예를 보여주는 것이요, 안전을 가져다준다. 자식은 마치 장수의 화살통에 있는 화살과 같다. 성경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는 분명 그렇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있다. "으이구, 자식이 웬수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
사교육비로 힘든 요즘, 정말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이다. 세 아이를 교육시키려다 보니, 더구나 현대무용을 하는 막내딸을 예고에 보내다 보니, 누구보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더구나 요즘 아이들 키우기가 여간 까다로운가? 아무 거나 먹지도 않는다. 자기 취향에 맞지 않는 옷을 사주면 입지도 않는다. 자기 맘에 내키지 않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떼를 쓰고 나뒹군다.

더욱이 사춘기가 되면 걷잡을 수 없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을 단속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말을 붙이기조차 힘들다. 친구들과 어울려 오락실이나 다니고 가출이나 하면 정말 죽을 맛이다. 그러니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캄캄한 터널을 지나는 심정이니까. 해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으니까.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니, 정말 정답이 없다. 아무리 잘하려고 애를 쓰지만, 통제가 불가능한 아이들 때문에 수없이 눈물을 흘리며 후회해 본다.

개념 없는 아이들의 행동에 잔소리도 해 본다. 그런데 아이들은 부모의 잔소리를 들을 생각도 안 한다. 급기야 화가 치민 부모 입에서 거친 말이 나온다. 그러면 아이들은 방문을 꽝 닫으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며 말한다. "재수 없어!" 이내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근다. 자녀는 폭탄, 부모는 폭발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농사가 무엇보다 소중하다. 직장이나 사업보다 더 중요한 게 자식농사다. 사업이 아무리 잘 돼도, 직장에서 아무리 잘 나가도, 자식농사를 망치면 기쁨이 사라진다. 그렇기에 말하지 않던가. "한 해 농사 망치면 일 년을 고생하지만, 자식농사 망치면 평생 고생한다."

지금까지 자식 농사를 소홀히 여겼다면, 자식농사에 좀 더 주력해야 한다. 그런데 어려운 게 있다. 공부는 혼자 열심히 하면 된다. 사업이나 직장생활도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자식농사는 정말로 마음대로 안 될 때가 많다.

남들이 이렇게 했다고 해서 나에게도 특효약이 되라는 법은 없다. 그렇기에 '자식교육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이 수긍된다. 남들에게는 효과가 있었는데, 나에게는 아무런 효험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말한다. '왕도는 없다. 최선의 길이 있을 뿐이다.' 부모로서 자식들의 미래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기를 바라면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아이들을 바르게 양육하기 위해 눈물을 뿌려본다. 그들을 뒷바라지 하느라 수고의 땀을 흘려본다. 때로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놈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호소도 해 본다. 그저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그날을 기대하며.

그런데 왜 이렇게 답답할 때가 많은가? 다른 것은 자신이 있는데, 자식 교육만은 자신이 없을까? 그래서 시편 기자의 외침에 한 표를 던진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살다 보면 내 노력과 힘대로 안 되어서 몸부림칠 때가 많다. 그래서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항복한다.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자식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부모의 과도한 욕심과 기대가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제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데 이제 더 이상 못 버티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죄송해요."

부산에 있는 어느 아파트, 어느 날 한 청소년이 투신자살을 하면서 죽기 전에 어머니에게 보낸 마지막 메시지이다.

죽음을 선택한 학생은 전국적으로 2% 안에 드는 우수한 학생이다. 경북 포항의 자율형 사립고에서도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그가 왜 투신자살을? 학업 스트레스 때문이다. 공부가 뭐길래. 대학이 다는 아닌데. 성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너무 가슴 아픈 일이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불태운다'는 옛말이 실감난다. 어느 부모인들 자식이 공부 잘하기를 바라지 않으랴! 좋은 대학을 보내고 싶은 욕심이야 모든 부모의 바람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자식을 잃어야 한다면? 그런데도 불구하고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는 사람들은 여전하다.

공부를 좀 못하면 어떤가? 우리 곁에 있기만 해준다면.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하면 어떤가? 함께 밥상을 대할 수만 있다면. 그런데 불행하게도 자기 자녀의 목숨을 공부의 희생 제물로 바치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 자식을 잃고 난 후에야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한다. 부질없는 일이다. 성적에 대한 욕심을 조금만 버리면 될 텐데. 진짜 중요한 건 자녀의 존재 자체가 아닐까?

지금 우리 자녀들에게는 '공부하라'는 독촉보다, '힘내라'는 격려가 더 필요하다. '왜 너는 맨날 그렇게 뒤에서 빌빌대!' 라는 잔소리보다, '넌,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니까 괜찮아!'라는 용기를 주는 말 한 마디가 필요하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20세기 낳은 세계적인 부흥사이다. 그가 어렸을 때 동네 말썽꾸러기였다. 사람들은 빌리 그래함을 바라보며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저 애는 커서 도대체 뭐가 되려나?" 그런데 그의 할머니는 손자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하곤 했다. "너는 말 잘하는 재주가 있어. 그 개성을 살리면 큰 사람이 될 거야." 할머니의 격려하는 말 한 마디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공부, 공부, 공부! 정말 미치겠어!' 우리 아이들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이다. 학교 가도 공부, 학원 가도 공부, 교회 가도 공부, 집에 가면 더 공부! 정말 미치겠단다.

모든 부모를 전염시킨 일등병. 학원을 보내야 안심되고, 대학을 보내야만 부모 노릇 한 것처럼 생각되는 시대. 노후대책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밑 빠진 독처럼 쏟아 부어도 끝이 없는 교육투자. 그렇게 쏟아 부어도 남는 건 실망 뿐인데도.

그런데 시각을 좀 바꾸면 안 될까?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계발해 주는 데 초점을 맞추는 교육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교육으로. 모두 다 공부를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출세라는 올가미 때문에 좋아하지도 않는 것을 부모의 강요에 의해 마지 못해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가드너는 '다중지능이론'을 제시했다. 사람에게는 몇 가지 지능이 있다는 것이다. 언어지능, 논리수학지능, 음악지능, 신체운동지능, 공간지능, 대인지능, 자성지능 등. 우리 아이들은 어떤 지능이 발달되었는지를 발견해야 한다.

나는 가끔 현대 무용을 하고 있는 막내딸을 보면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했는데, 우리 아이는 중학교 시절에 시작했다. 그러니 몸의 유연성이 남보다 떨어진다. 키도 큰 편은 못 된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돈도 대주지 못한다.

새벽 레슨을 시작하면 밤늦도록 연습해야 한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발표회나 콩쿨이 다가오면 몸무게를 조정하기 위해 음식도 못 먹는다. 안타까운 마음에 한 마디 한다. "지금이라도 다른 것을 해라. 뭘 해도 좋으니...."

그런데 아이는 그게 좋단다. 힘들지만 그래도 좋단다. 나는 공부는 해도, 무용은 못 한다. 그런데 딸은 무용은 해도, 공부는 못하겠단다. 우리는 걸어가야 할 길이 서로 다르다. 부모는 그걸 인정해야 한다.
어느 날 박지성 선수의 아버지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 있다. "공부는 못하는데, 공 하나는 잘 차더라!" 그래서 공을 차게 했다. 그 결과 세계적인 축구 스타가 되었다. 공 차는 것을 즐거워하니 공을 잘 차게 해 주었다. 즐겁게 공을 차더니 세계적인 선수가 된 것이다.

설혹 박지성 선수처럼 세계적인 스타가 되지 못하면 어떤가? 자신이 걸어가는 인생에,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긍지를 갖고 열심히 살아가면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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