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1959년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동안 훌륭한 스승을 많이 만났다. 학문분야에서는 물론 신앙, 삶, 인격에 사표가 되는 분이 많으셨다.
그 중에 히브리어와 구약을 가르치신 박대선 교수님를 잊을 수 없다. 그때 일이 주마등 같이 떠오른다. 첫시간 강의실에 오셔서 까까머리 고등학생티를 막벗은 우리들 출석을 부르시면서 장차 목사님이 되실 분들이니까 존대해 드려야지 하시면서 이름 뒤에 '씨'자를 붙여주셨다. '박석규씨, 이덕웅씨, 홍영표씨, ... 그러시다가 박대걸 차례가 왔다. 망설이더니 웃으시면서 '박대걸씨' 하셨다. 박대걸은 교수님의 막내 동생이었다. 그후 그분은 신학교 교수에서 일약 사립의 명문 연세대학교 총장으로 1964년 부임하여 화제가 된 분이다.
영광스러운 총장 선임 소식을 들으시고 극구 사양하시다 간곡히 부탁하는 이사장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어 4대 총장에 부임하여 3선 임기중 멋진 일화를 남기고 자진 사임하셨다.
재임 기간은 반독재 시위가 한참이던 시기였다. 시위에 가담했던 학생들을 한번도 중징계하지 않았고 도리어 교도소를 찾아가 수감되어 있는 학생들에게 일일리 영치금을 넣어주고 문교부 지시를 거부하고 개강을 하며, 2명의 해직 교수(김동길, 김찬국)를 복직시키고 시국사건으로 체포된 23명의 학생을 복학시켰다. 끝내 정부의 압력에도 유신을 반대하던 학생과 교수를 보호하며 징계 문서에 사인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사직서에 사인하고 1975년 총장직을 물러나셨다. 총장 공관에서 11년을 청빈하게 살고 퇴임하니 거처할 집이 없으셨다. 그래서 고 원일한 연세대학교 재단 이사가 자택을 마련해주고 제자들이 가정제품을 준비해드렸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남아있다. 그렇게 사시다 94세를 일기로 2010년 4월 29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오늘이 3주기를 맞는 날이다. 아- 선생님이 그립다. 선생님이 간절히 보고 싶다. 어디 또 선생님 같으신분 안계신가...
신학교 때 이런 일도 있었다. 처음 듣고 외우는 히브리어는 생소했고 어려웠다. 교수님은 언제나 강의를 마치시고 시험을 치셨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오셔서 시작하기 전에 성적을 알려주셨다. 어김없이 모두가 0점 이었다. 그래도 한명 빼놓치 않으시고 30여명 이름을 일일히 부르시면서 0점, 0점 하셨다. 그래서 어느날엔가는 학생 모두가 도서실에 모여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주 히브리어 시간이 되었다. 들어 오시더니 "오늘은 시험을 먼저 보고 강의 하겠읍니다" 하시면서 시험지를 나눠주셨다. 그때 반장이던 학생이 일어나 "교수님, 배우지 않은 것을 시험 문제로 내셨습니다" 교수님이 대답하셨다. "여러분들 지난 시간 안오셨군요? 나는 와서 어김없이 강의 하였는데요 ..." 하시면서 시험지를 회수하셨고 다음 시간 역시 강의 전에 "오늘은 먼저 성적을 알려드리고 강의하겠습니다" 하시면서 성적을 알려주셨는데 줄줄히 0점, 0점 이었다. 그렇게 철저히 그분 특유의 입가에 거품을 머금으시며 4년을 가르쳐주신 덕분에 우리반 학생은 졸업 할 때 한 사람도 히브리어에 F학점이 없었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하나 더 있다. 당신께서는 5개의 박사학위를 가지고 계시면서도 '박사' 보다 '목사'가 더 낫다시면서 그러니 당신을 박사보다 목사라고 불러달라고 하셨고 그렇게 불러드리는 것을 것을 좋아하셨으며 '박사'보다 '목사'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시더니 총장을 사임하신 후 크지도 않은 신애감리교회를 맡아 담임목사로 시무하시면서 그렇게 기뻐하셨다고 들었다. 참으로 롤모델이 되는 분이셨다. 마지막 가시면서 연세대학교 의대 학생들의 의학 교육과 연구를 위해 시신도 기증하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 나이를 먹으니 스승님이 더더욱 그립다. 멋있게 한 평생을 살다가신 스승님이 너무, 너무 부럽고 존경스러워 하늘을 우러러 추모하며 명목을 빌며 감히 다짐해 본다. 나도 그분처럼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