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발발

전 미주장신대 총장 김인수 목사

한국에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선교되기 전, 기독교 성직자 한 사람이 한국을 다녀간 일이 있었다. 그가 한국에 와서 전도하고 신자가 생겨났다면 그것이 한국교회의 시작일 터이다.

최초 기독교 성직자가 한국에 다녀간 때는 단군 이래 가장 비극적인 전쟁 중 하나였던 임진왜란 때이다.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한국 정벌의 허황된 꿈을 꾸면서 1592년 임진년에 약 16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 침략에 나선다. 전후 7년에 걸친 대 전란 속에 조선은 치명적 상처를 입었고, 무수한 군민(軍民)이 처참하게 도륙되는 참상이 이어졌다. 농지는 피폐됐고, 농민은 왜란 전의 1/3에 불과했으며, 기근과 질병으로 무수한 인민이 쓰러졌다. 경복궁과 불국사가 소실됐고, 전주 사고(史庫) 이외 모든 사고가 불탔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서적과 예술품들이 파괴, 약탈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이 전쟁의 참상을 묘사한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 보면 "취하고 포식(醉飽)한 명나라 군인(明兵) 한 명이 노상에서 구토하매 사람들이 서로 달려들어 다투어 주워 먹고, 약한 자는 그것도 못 얻어먹고 호곡하였다"는 이 한마디 말 속에 당시 참상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지 20일도 못되어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을 거쳐 함경도까지 북상하였다.

▶가톨릭 성직자 세스페데스의 내한

조선에 상륙한 왜장 중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이 있었는데, 그는 아구스티노라는 영세명을 가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그의 휘하 군인 중에는 적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이 있었다. 가톨릭의 성례 일곱 가지 중, 종부(終傅)성사가 있다. 종부성사는 가톨릭 신자가 죽기 직전에 신부에게 그동안의 죄를 고백하고, 사죄의 선언을 들은 후, 영성체(성찬의 떡을 받는 것)를 해야만 천국으로 가는 중요한 성례이다.

만약 종부성사를 하지 못하면, 그 영혼은 연옥(煉獄)으로 가게 된다. 따라서 종부성사를 하느냐 못하느냐는 천국과 연옥의 갈림길이 된다. 성사(聖事)는 신부만이 집례 할 수 있으므로 전장에서 전사하는 가톨릭 군인들을 위해서는 종군 신부가 필수적이다. 소서행장은 자기 휘하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종군신부 한 사람을 보내달라고 일본 관구장 고메즈(P. Gomez)에게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고메즈는 스페인 출신 신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를 조선에 파송하였다. 따라서 세스페데스 신부는 반만년 배달겨레 역사에 이 땅을 처음으로 밟은 기독교 성직자가 된다.

▶세스페데스의 사역

세스페데스는 1551년 스페인의 마드리드(Madrid)에서 태어나 18세에 예수회에 입단하였고, 인도 고아(Goa) 지방에서 선교 사역을 하던 중 신부로 서품됐다. 그 후 그는 일본으로 선교지를 옮겨 활발한 선교 사역을 하여 100여명에게 영세를 베풀었고, 그의 뛰어난 일본어 구사 능력은 많은 일본인들에게 호감을 주었다. 아울러 그는 고위층들과도 사교의 범위를 넓폈는데, 그 중 소서행장도 끼어 있었다. 세스페데스는 조선에 입국해 소서행장이 머물고 있던 곰개성(城)(현재 경남 진해시 웅천동(熊川洞)에 도착 하였는데 이때가 1593년 12월이었다.

세스페데스가 조선에서 수행한 일은 종군 신부의 일상적인 사역인 미사 집례, 고해 성사를 받는 일, 그리고 임종 직전의 병사들을 위한 종부(終傅)성사 집례였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그가 조선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느냐이다. 그러나 이 일을 입증할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가 머물렀던 곳은 일본군 진영이었고, 일본군 진영 근처에는 조선 사람들이 소개(疏開)되어 조선인이 없었다. 또한 그는 조선말을 전혀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내한 목적도 전도는 아니었다. 온갖 악행을 자행했던 침략군과 더불어 들어온 서양인의 전도를 받아들일 조선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한국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몇 개월 뒤 일본으로 귀환했다. 그 이유는 불교 신자 장군들의 천주교 보급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세스페데스가 몇 개월 머물다 간 경남 웅천은 한국 개신교의 위대한 순교자 주기철(朱基徹) 목사의 고향이다. 점령군과 함께 한국에 처음 온 기독교 성직자의 자취가 남아 있는 그 곳에서 일제시대 때 신앙적 항일 투쟁을 하다 거룩한 순교의 피를 흘린 주기철 목사가 태어난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기독교 성직자로는 최초로 한국 땅을 밟은 세스페데스는 한국에서 선교의 흔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일본에 돌아간 후에 인질로 잡혀온 5만여명에 이르는 한국인들을 위한 훌륭한 일을 수행했다.

일본은 전비(戰費) 조달을 위해 노예 상인들에게 이들을 팔아 넘겼는데, 세스페데스는 이러한 비인간적인 만행을 종식시키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는 이들 포로들을 위해 한국어로 교리서를 번역하고 가르쳐 2천여명을 개종시켰고, 망향의 한을 품은 이들에게 영혼의 안식을 제공했다.

이국땅에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한국인 신자 21명이 덕천가강(德川家康)의 기독교 박해시 순교했다. 그들 중 9명은 1867년 205명의 일본인 순교복자 시복(諡福) 시, 그 중에 포함돼 있었다. 한국의 가톨릭 선교 가능성은 모든 문물이 그랬던 것같이 중국을 통해 이루어진다. 다음에 중국을 통해 전래되는 한국 천주교회의 모습을 더듬어보기로 한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김인수목사 #김인수칼럼 #한국기독교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