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타연합장로교회 정인수 담임목사

종종 잘 믿던 사람들이 교회가 시험에 들거나 교회에 불미한 일이 생기면 마음의 충격을 받고 신앙생활로 부터 떠나는 것을 보게 된다. 내가 아는 어느 자매는 아버지가 하나님을 잘 믿었는데 그만 질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 때 자기는 그런 하나님을 믿고 싶지 않다 고 하며 교회를 떠나 지금까지 방황하는 것을 보게 된다. 불신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회의적인 기독교인들이 있다. 안 믿는 자니 찜찜하고 믿자니 자신이 없고 중간 지대를 오가는 이중적인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도마는 예수님의 제자 중 회의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사실 주님이 돌아가신 그 때에는 도마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믿기 어려웠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보다도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 어려웠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죽으시면 안 되는 분이셨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왕의 자리에 등극해야 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권력지향적인 제자들은 한 자리씩 차지해야 하는데 죽으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예수님을 향한 모든 기대가 무너져 버리고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신분 때문에 그들은 두려워하며 문을 잠그고 있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도마는 십자가 사건에 실망한 나머지 주님의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 자체를 싫어하였다. 요한복음 20: 24절에 보면 도마는 과학주의의 사고로는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어 무덤에 장사된 예수가 다시 산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예수가 죽은 마당에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으면 무엇 하느냐고 생각하면서 그 공동체의 자리를 회피하였다.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회피이자 고립이었다.

신앙에 대해 의심하는 일반적인 원인 중의 또 하나는 기질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기질 자체가 무언가 새로운 진리와 혁신을 잘 인정하고 받아 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성격상 우울하고 비관적인 성격의 사람들은 신앙에 대해 자주 회의를 품는다. 이런 분들에게는 의심이 많기 때문에 인생의 긍정적이며 희망적인 부분들을 놓치며 산다. 또 과학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분들은 주관적인 신앙의 진리에 대해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도마는 이러한 회의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임을 잘 대변하고 있다. 도마는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라고 말한다. 내가 경험하고 깨달은 것 외에는 도저히 진리로 수용할 수 없다고 하는 그런 분들의 모습과 같다. 도마는 내 손가락을 부활 예수에게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는 매우 단호한 선언을 한다. 나는 결코 믿지 않겠다 라는 의미이다. 그 결과 도마는 영원토록 의심 많은 도마가 되어 버렸다.

도마의 또 다른 문제는 고립의 문제이다. 그는 제자들과 떨어져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든지 그는 결국 그 고립으로 인해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한다. 신앙생활에서 고립이란 유익한 것이 되지 못한다. 교회라는 공동체를 떠나 살면 믿음이 흔들리기 쉽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일 때 내가 그들과 함께 하겠다 라고 약속하셨다 (마 18:20).

주간에 소그룹으로 모여 사랑과 믿음의 교제에 동참하는 것은 신앙의 성장에 대단히 중요하다. 주일날 성도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를 어느 날부터 이런 저런 이유로 불참하기 시작한다. 소그룹 모임이나 동역 모임도 안 나간다. 기도의 모임도 외면한다. 인터넷에서 혼자 예배 드려도 되지 않나? 그렇게 쉽게 생각한다. 그러한 고립이 어느 날부터 믿음을 흔들어 놓는다. 믿음의 공동체로부터 멀어진다. 도마의 불신이 찾아온다.

도마의 불신, 현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한다. 부활의 주님을 경험해야 불신과 회의를 극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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