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자기 삶의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고 철저하게 믿고 있었던 한 남자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그는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엉덩이가 시퍼렇게 멍든 채로 바닥에 누워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나님, 이렇게 끝내게 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성경은 아주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연의 법칙을 얼마나 존중하시는지, 또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기도에 응답하시기 위해 창조의 질서를 파괴하고 거슬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분 자신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에 개입하실 때는 일방적으로 그분의 주권을 주장하시는 대신 자연 법칙과 그분의 피조물의 선택을 존중해 주신다. 기꺼이 포기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하게 드러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빌립보 2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부분을 잘 설명해 놓고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결단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기도의 역할이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를 완전하게 이해한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적어도 다음 세 가지의 경우 예수님 자신도 기도가 응답되지않는 상황을 경험하셨고, 그 중 한가지 기도는 지금까지도 응답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1)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셨다. 그러나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당장은 그랬다. 2)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기도하셨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나중에 기도가 응답되기는 했지만 돌아가신 후 이틀 동안은 아니었다. 3)예수님의 세 번째 기도는 2천년 동안 응답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렸다. "내가 비옵는 것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0-21) 그리스도인의 연합이라는 이 숭고한 기도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역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까지 성취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다른 두 가지 기도와는 달리 하나님의 이 특별한 소망은 인간의 자발적인 순종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분열하고 타인을 용서하지않는것은 하나됨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애절한 기도를 부인하는 행위다. 하나님은 당연히 그분의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실 수 있지만 피조물의 의향을 존중해 주신다. 파스칼은 이것을 "인과관계의 존엄" 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권능은 피조물을 윽박질러 억지로 복종케 하는 힘이 아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시지만 그분의 나라는 독재국가가 아니다.오히려 하나님은 기도하시고, 기쁨을 주시고, 사랑하시고, 경청해 주시고, 그분 자신을 낮추시는 분이다. 파괴하고 속이고 약탈하는 것은 사탄의 계략이다. 하나님의 본성은 우리 마음을 부드럽고 세밀하게 보듬어 주시고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존중해 주시는 것이다. 끔직한 꿈을 꿀 때가 있다.우리는 그런 꿈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그 꿈을 하나님의 계획을 예견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운명론자 처럼 체념하고 있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함으로 설령 절망이 다가와도 도전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창조의 핵심적인 원리 가운데 하나로서 하나님은 에덴동산 한가운데 아담과 하와가 먹을 수 없는 선악과 나무를 세워 놓으심으로써 자유의지의 원칙을 정해 놓으셨다. 그 선악과를 통해 인간의 자발적인 순종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하나님이 불순종이라는 위험한 가능성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이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친밀감이 형성된다. 자연히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밀감도 그 뒤를 따르게 된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처럼 순수하고 희생적인 친밀한 관계가 된다. 하나님은 그분 안에 존재하는 자기희생의 사랑으로 인간이 아름다운 관계를 나눌 수 있도록 창조해 주셨다. 하나님은 미리 짜놓은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로봇을 만드신 것도 아니고, 명령대로만 복종하는 군대를 만드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창조할 수 있는 능력과 관용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자기를 억제할 수 있는 능력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모두 지닌 인간을 만드셨다. 그 능력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자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보물이었고, 하나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
하나님 편에서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능력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신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 없었다. 바바라 테일러는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라는 책에서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 중에서 가장 위험한 단어가 '아담'이었다"고 했다. 하나님이 위험한 일을 하시다니!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이라는 유혹에 넘어갔을 때 그 죄에 대한 대가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와는 두 가지 사실을 의심하게 됨으로써 뱀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다. 한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다는 것에 대한 의심이었고("너는 절대 죽지 않을 꺼야"),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계획이 선하다는 것에 대한 의심이었다("하나님은 네가 그 열매를 먹게 되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고 하나님의 계획이 선하다는 것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 하와는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되면서 정신적인 공허함에 빠지게 되고 사랑의 부재에서 비롯된 공허는 미움과 이기심이 자리잡게 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시하면서 자신들의 존재와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세상을 산산조각냈던 죄는 아담의 사소한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인간에게 다시 한 번 주신 구원의 기회 앞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