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성결교회 김종민 목사

올 해는 예년에 비해서 부활절이 빠르다. 보통은 4월쯤인데 3월 말에 부활절이 있어서 생각보다 분주한 3월이다. 크리스마스가 예수님의 생일을 기념한다면 부활절은 교회의 생일이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한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산고의 고통을 통과해야 되듯이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거쳐야 한다. 즉 부활을 경험하려면 먼저 철저하게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을 하는 노력을 한다. 한 주간 동안 날을 정해서 금식을 하기도 하고, 졸음을 참고 새벽기도에 나가기도 한다. 특별히 성경을 더 많이 읽으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요즘은 '미디어 금식'이라는 새로운 단어도 등장했다. 일정한 기간 동안 인터넷을 포함한 컴퓨터나 TV, 혹은 게임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요즘 젊은 세대에서는 밥 굶는 것보다 미디어 금식이 훨씬 더 힘든 것 같이 느껴진다.

이것에서 좀 더 지나친 고통의 동참은 실제적으로 육체에 고통을 가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을 생각하며 등에 피가 날 때까지 채찍으로 자신을 때린다든지, 심지어 필리핀 같은 곳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재현하면서 실제로 대역을 맡은 사람의 손에 못을 박기도 한다. 물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지는 않는다. 그러면 진짜 죽으니까.

그러나 이런 자발적인 고난의 동참에 참여하기 앞서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우리가 이런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나누기를 원하시는가 하는 문제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내가 너희들 키우느라 고생했으니까 너희도 나랑 똑같이 고생을 당해 봐야 한다'는 말과 같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고생한 만큼 그대로 자녀의 고생으로 되돌려 받고 싶겠는가? 또 자녀들이 부모의 고난을 같은 고난으로 갚으려고 밥을 먹지 않고 일부러 고생한다고 해도 그런 자녀를 보고 기뻐할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아니다. 고난 주간에 나태해졌던 삶을 바로 잡는 노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그리스도께서 당한 고난은 다르다. 그리고 그런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의 고난으로 되갚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세상을 위해 죽으신 그 의미를 깨닫고 기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못박힌다고 해도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 없는 일이다.

고난을 통한 의미는 '용서'와 '화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면서도 원래 죽어야 할 죄인을 용서하셨고, 하나님과 인간이 죄 앞의 심판이 아닌 십자가 앞의 화해를 이루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이 의미는 우리의 삶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부모를 용서하고, 자녀와 배우자를 용서하고, 원수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아무리 우리의 몸과 정신을 괴롭게 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는 밥을 굶는 것보다 아니 그 어떤 것보다 세상을 향하여 용서와 화해를 선포하는 것이 더 크게 그리고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실제로 훨씬 더 힘든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오해와 상처 받을 것을 알면서도 숨김없는 나의 본 마음을 드러내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고난은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 참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한계를 생명의 대가를 치르며 넘으셨다. 우리 앞에도 쉬운 고난과 영혼을 쥐어짜야만 하는 고난이 있다. 과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어떤 고난을 기쁘게 받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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